2009. 7. 21. 20:34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오늘, 대학을 말한다-10]






2009년 07월 21일 (화) 09:18:49 류승완 .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 촉구 국회앞 텐트농성 684일째!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http://stip.tistory.com

대학생의 공간-비정규직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84225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이 땅의 대학원생은 참 학문의 열정을 포기해야 살 수 있는가?(사진/이광수)

 










입시로또의 꿈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따님이 이번에 ㅅ대학에 들어갔다면서요.” 몇 년 전에는 이런 인사가 흔했다.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형편이 펴지고, 부모의 체면이 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집안의 형편이 펴진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이번에 검사가 되셨다면서요.” 이 정도는 되어야 편하게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는 우리의 가족문화에서 혈육에 대한 육친의 기대와 헌신은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애틋하다. 자식 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부모의 심정은 해마다 신문에 실리는 ‘수능시험장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신문에는 해마다 꼭 같은 기사가 실린다. “학교수업 만으로 전국수석” 그 옆에 “역경을 딛고 명문대 합격”이란 기사가 양념으로 붙어 있는 것도 해마다, 신문 마다 같다.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모든 학부모들이 입시경쟁에서 내 아들 딸만은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를 가진다. 나아가 입시경쟁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의 미래를 보장해주리라는 꿈을 가진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서너 살 때부터 꼬박 15년을 어른도 견디기 힘든 입시경쟁 속으로 기꺼이 밀어 넣고 있다. 이 경쟁은 승리한 1%에게 평생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입시로또이기 때문이다.

로또는 2천원을 걸지만 입시로또는 평생을 건다. 아주 힘들어서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기도하는 어머니’와 ‘학교공부에만 충실한 전국수석’과 ‘역경을 이겨낸 합격생’ 옆에는, ‘대입시험 비관자살’의 悲報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다. 아마도 지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공부를 못해서’ 죽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입시로또의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지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죽어야 하는 괴로움마저도 이겨내는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이 꿈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과 계층재생산의 꿈이다. 없는 자는 자식을 가르쳐서 없는 한(恨)을 풀려고, 가진 자는 기득권을 물려주려고 ‘간판’과 ‘자격증’이라는 꿈의 대열에 개미처럼 줄서는 것이다. 도대체 이 꿈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근대화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근대적 교육제도이다. 그리고 근대적 교육제도란 다름 아닌 1백년 전 일제(日帝)가 우리에게 강제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본질은 ‘절대다수의 희생과 소수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물론 특권을 누리는 소수는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인들과 그에 협력한 한줌 친일반역자들이었고, 희생당하는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이제 해방과 분단이 60년을 지났건만 이 꿈은 ‘사교육’ 이라는 현실과 절묘하게 얽혀있다. 서로 안 맞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맞아서 갈등이다. 꿈은 한풀이와 기득권대물림의 절묘한 조화이다. 현실은 식민지 교육제도와 상업주의의 절묘한 조화이다.

‘2007년 현재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국내총생산(GDP)의 6.4%, 55조원 규모로 농어업보다 2.2배가 크고, 부동산·건설업 등과 맞먹는다. 전체 건설업 종사자가 180만명인데, 사교육종사자 160만 명이다. 국민전체 지출의 11%로 가계비에 가장 큰 부담인데 불황에도 유일하게 높아진다. 소비지출의 9.4%로 추정되는 교육비는 OECD 국가들 중 수위를 다투고 있다. 이에 비해 정부지출은 43.4%에 불과하고 공교육비 정부분담률은 59.7%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이다. 결국 공적인 교육산업을 사적 영리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교육산업의 신자유주의화이다(김일영, 2009, <한국교육산업의 현주소>, 새사연).’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어린쥐’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팔 걷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입시로또가 조선의 농민에게 대과 급제처럼, 일제하의 농민에게 대학교처럼, 누군가는 해당되지만 절대다수 ‘돈 없는’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입시로또의 꿈은 ‘식민주의 공교육’과 ‘상업주의 사교육’이라는 현실과 칡덩쿨처럼 얽혀서 아이들을 기약 없는 ‘입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 치달음의 끝은 어디인가?

입시로또라는 경쟁은 누구에게도 성공을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불행과 극소수의 행복’ 만은 확실히 보장한다. 그런데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근대의 기본공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가치는 우리 생각을 규정하는 절대선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교육제도와 현대적 교육시스템이 이 기본가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 논리상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도 그대로 모순으로 나타난다. ‘기도하는 어머니’, ‘과외안하는 전국수석’, ‘역경을 이긴 학생’이 한결같이 달려간 ‘어린쥐’ 교육의 끝, 한국의 대학에는 또 다른 어린 쥐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다.

전문대 위에 4년제, 지방사립대 위에 지방국립대, 지방대 위에 수도권대, 수도권대는 명문대와 비명문대, 명문대는 비인기학과와 인기학과, 인기학과는 국내학위와 외국학위, 외국학위는 또 출신대학별로 줄을 서야 한다. 이 뿐이 아니다. 본격적인 줄서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학 사회는 돈을 내는 집단인 학생과 돈을 버는 집단인 재단과 교수로 나누어져 있다. 학생은 학부생, 석사과정, 박사과정, 박사 후 과정으로 구별된다. 교수는 조교, 직원, 시간강사, 겸임교수, 대우교수, 연구교수/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나누어진다. 다시 (정)교수는 학과장, 학장, 보직교수, 부총장, 총장으로 나뉘고, 그 뒤에는 사학재단과 교육관료로 연결된 먹이사슬이 있다.

그리고 교육산업을 지배하는 사교육 카르텔이 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 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오늘도 교육로또를 꿈꾸는 절대다수의 ‘대리만족형’ 서민들이 허리를 휘어가며 아이들을 숨막히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로또 추첨의 결과는 언제나 ‘기득권 세습형’의 승리, 극소수를 위한 절대다수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극소수와 절대다수의 사이에 ‘역경극복형’이 있지만, 언론의 과대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자살형’과 마찬가지로 꼴찌당첨자일 뿐이다.

대학원생의 꿈

그러면 도대체 입시경쟁의 종착점이라는「지금」,「여기」의 대학의 실상은 어떤가? 이러한 현실에서 대학원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이런 질문은 막대한 등록금을 바쳐가면서 내 자녀와 제자의 인생을 믿고 맡기는 ‘대학’에 대해서 학부모나 선생님들도 같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대학의 본령은 학문연구를 통한 교육과 지식의 생산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원생들은 대학의 중추, 나아가 사회의 미래라 할 만하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쳐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확률은 그야말로 로또당첨에 버금가는 확률일 것이다. 10만 명을 훨씬 넘는 한국의 비정규교수(시간강사)와 대학원생들이 이 어려운 관문을 거치는 이유는 대부분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진실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어려운 관문을 뚫은 사람들이 교수임용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오늘날 한국대학의 현실이다. 그런데 진실과 합리를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이 이 현실에 침묵한다. 왜 그런가? 바로 여기에 어린 쥐의 행렬, 교육로또의 먹이사슬의 비밀이 숨어있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고리는 바로 ‘비정규교수’에 대한 합법적 제도적 차별이다. 비정규 교수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비정규교수와 정규교수(전임강사 이상)는 임금(동일노동에 10배 이상 격차), 고용, 신분, 처우, 복지 등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직원은 교원이지만 시간강사는 교원이 아니며 그렇다고 노동법이 보장하는 근로자도 아닌 실종된 존재이다. 그의 인권과 노동권은 사회적 평균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어떤 대학원생도 ‘눈물의 골짜기’를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학문적 진리보다는 눈치보고 줄서는 어린 쥐의 대열에 끼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학위를 받는 과정 자체가 일제 식민지 교육의 봉건적 요소를 철저하게 유지해놓고 있다. 제도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원천적으로 가로막힌다. 합리적인 연구자는 꿈을 거세당하고, 비판적인 연구자는 존재자체를 부정 당한다.

이 모든 문제가 교원관련 법조항에 원래 있던 ‘강사’ 한 단어를 복원하면 해결되는데도 10만 명이 넘는 대학원생들이 침묵하고 있다.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 우리 대학원생은 생활을 위해 꿈을 접고, 살기위해 비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상의 모든 나라 가운데, 대학원생, 연구자가 ‘참다운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에 죽어야 하고, 그것을 포기해야만 살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이러한 현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버려야만 살 수 있는 대학원생의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글 류승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수료)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