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베르 도리약과 학인의 자유/곽차섭
[오늘, 대학을 말한다-12] | ||||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 촉구 국회앞 텐트농성 694일째!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대학생의 공간-비정규직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84225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중세와 르네상스의 학자들은 종종 방랑자였다. 아직 지식이 표준화 되어 있지 않던 시절, 그들은 더 나은 지식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계를 이어줄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이른바 “방랑학자”(wandering scholars)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 뒤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된 제르베르(946?-1003)이다. 그는 비록 최초의 방랑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유명한 학자였다. “악마만큼 지혜로운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파뉘르쥬가 물었다. “아니.” 팡타그뤼엘이 대답했다. “신의 특별한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지.” 중세 초기의 사람들에게 제르베르의 놀라운 학식은 신과 악마를 연관시키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시 안 안달루스는 기독교 유럽보다 훨씬 더 진보한 곳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도서관도 장서수가 1천권이 넘지 못한 데 반해, 무슬림 수도인 코르도바의 도서관은 무려 4십만권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었다. 카탈루냐는 무슬림의 문화 중심지와 가까운 잇점이 있었고, 그래서 빅 주교좌 성당과 인근의 리폴 수도원 도서관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당시 무슬림 천문학자는 세계 최고 중 하나였고, 천문의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천체 측정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흔적은 백조자리의 알파성 데네브나 항성 중 가장 밝은 시리우스 성 등 대부분의 주요 행성의 이름이나, 천문학에 관련된 다른 많은 것들, 예컨대 방위각을 뜻하는 “azimuth”나 천문서인 “almagest,” 혹은 황도대(黃道帶)를 의미하는 “Zodiac” 등의 어휘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랍인들은 산술에서도 훨씬 더 앞서 있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영(零)의 개념을 차용하였고, 근대와 같이 위치로 값을 결정하는 수체계를 사용하였다. 사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숫자의 모양도 아랍식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중국으로부터 주판을 배워와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산술을 넘어서 대수학을 정립하였고, 소수(素數)와 좌표방정식도 연구하였다. 그들은 비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상당히 정교한 방식으로 음악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 음표를 정확히 구분하고, 화음과 불협화음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매우 정확히 튜닝을 한 악기를 만들었다. 빅의 주교좌 성당 학교는 제르베르에게 이 모든 지식의 많은 부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제르베르는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였다. 제르베르는 또한 아라비아 숫자를 습득하여 로마식 숫자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계산도 암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주판 공부를 계속했고, 아주 큰 주판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랭스 성당 회중석 부분의 마루에 주판을 그려놓고 주판알 대용으로 수많은 원반들을 설치하였다. 그런 뒤, 성당학교 학생 약 64명을 모아놓고는 그들에게 원반을 밀어낼 막대기를 주고 자신은 마루 전체를 볼 수 있게끔 오르간 위쪽에 높이 앉았다. 그가 지시를 하면 학생들은 마치 원반밀어치기 놀이를 하듯이 원반을 움직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큰 숫자나 작은 숫자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주판에 관한 책을 썼고, 이는 새로운 성당학교에서 표준적인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의 수학연구에 혁신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보여준 경이로운 지식의 한 예에 불과하다.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