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31. 20:00

제르베르 도리약과 학인의 자유/곽차섭






[오늘, 대학을 말한다-12]







2009년 07월 29일 (수) 04:36:15 [조회수 : 115] 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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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인의 자유는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사진/이광수)

중세와 르네상스의 학자들은 종종 방랑자였다. 아직 지식이 표준화 되어 있지 않던 시절, 그들은 더 나은 지식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계를 이어줄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이른바 “방랑학자”(wandering scholars)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 뒤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된 제르베르(946?-1003)이다. 그는 비록 최초의 방랑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유명한 학자였다. “악마만큼 지혜로운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파뉘르쥬가 물었다. “아니.” 팡타그뤼엘이 대답했다. “신의 특별한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지.” 중세 초기의 사람들에게 제르베르의 놀라운 학식은 신과 악마를 연관시키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제르베르는 프랑스 중부 산악지대인 오베르뉴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정확한 장소도 부모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하층계급 출신으로 보인다. 963년경 그는 오리약의 생 제랄드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래서 뒤에 오리약의 제르베르, 즉 제르베르 도리약으로 알려지게 된다). 선자(善者) 제랄드는 이 수도원을 약 60년 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성 근처에 세웠고, 그 스스로도 그곳에 묻혔다. 그것은 클뤼니 수도원처럼 엄격한 베네딕트파 수도원으로, 어떤 지역 권위로부터도 독립적이며 오직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라이몽이라는 이름의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문법을 배웠다. 이때쯤이면 “문법”은 3학과--문법, 논리학, 수사학--의 하나로 가르쳐지고 있었다.

967년 바르셀로나의 보렐 백작이 수도원을 방문했고, 대수도원장은 제르베르를 에스파냐로 데려가서 수학을 배우게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제르베르는 아마도 똑똑한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수도원장은 그에게 고급 4학과--산술, 음악, 기하, 천문--까지 가르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렐은 이를 허락하였고, 그를 주교좌 학교가 있던 빅의 주교에게로 보냈다. 바르셀로나와 빅이 위치한 카탈루냐는 국경지역이었고, 그리하여 카탈루냐와 남쪽에 위치한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들과는 대단히 빈번한 교통이 있었다.

당시 안 안달루스는 기독교 유럽보다 훨씬 더 진보한 곳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도서관도 장서수가 1천권이 넘지 못한 데 반해, 무슬림 수도인 코르도바의 도서관은 무려 4십만권의 장서를 자랑하고 있었다. 카탈루냐는 무슬림의 문화 중심지와 가까운 잇점이 있었고, 그래서 빅 주교좌 성당과 인근의 리폴 수도원 도서관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무슬림 세계와 인접해 있다는 것은 단지 4학과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그리스 및 페르시아 과학의 계승자였고, 수많은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동시에 아랍의 여행자와 상인들은 인도 및 중국과 교류하면서 그곳의 선진 문명을 흡수한 바 있었다. 무슬림 “과학자들”은 높이 평가받았고, 그중에서도 안 안달루스가 중심이었다.

당시 무슬림 천문학자는 세계 최고 중 하나였고, 천문의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천체 측정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흔적은 백조자리의 알파성 데네브나 항성 중 가장 밝은 시리우스 성 등 대부분의 주요 행성의 이름이나, 천문학에 관련된 다른 많은 것들, 예컨대 방위각을 뜻하는 “azimuth”나 천문서인 “almagest,” 혹은 황도대(黃道帶)를 의미하는 “Zodiac” 등의 어휘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랍인들은 산술에서도 훨씬 더 앞서 있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영(零)의 개념을 차용하였고, 근대와 같이 위치로 값을 결정하는 수체계를 사용하였다. 사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숫자의 모양도 아랍식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중국으로부터 주판을 배워와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산술을 넘어서 대수학을 정립하였고, 소수(素數)와 좌표방정식도 연구하였다. 그들은 비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상당히 정교한 방식으로 음악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 음표를 정확히 구분하고, 화음과 불협화음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매우 정확히 튜닝을 한 악기를 만들었다. 빅의 주교좌 성당 학교는 제르베르에게 이 모든 지식의 많은 부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제르베르는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였다.

에스파냐를 유랑하면서 무슬림의 선진 학문을 흡수한 제르베르는 드디어 랭스에서 이름을 알릴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는 수력으로 움직이는 파이프 오르간 제작의 과제를 맡았다. 물론 이전에도 오르간은 있었지만, 그것은 오르간 연주자가 계속 페달을 밟음으로써 발생하는 공기압으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제르베르가 만든 오르간은 소리를 지속적으로, 더 넓은 음역까지 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학적으로도 잘 맞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화음은 서양의 어떤 오르간 보다 나았다.

제르베르는 또한 아라비아 숫자를 습득하여 로마식 숫자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계산도 암산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주판 공부를 계속했고, 아주 큰 주판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랭스 성당 회중석 부분의 마루에 주판을 그려놓고 주판알 대용으로 수많은 원반들을 설치하였다. 그런 뒤, 성당학교 학생 약 64명을 모아놓고는 그들에게 원반을 밀어낼 막대기를 주고 자신은 마루 전체를 볼 수 있게끔 오르간 위쪽에 높이 앉았다. 그가 지시를 하면 학생들은 마치 원반밀어치기 놀이를 하듯이 원반을 움직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큰 숫자나 작은 숫자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주판에 관한 책을 썼고, 이는 새로운 성당학교에서 표준적인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의 수학연구에 혁신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보여준 경이로운 지식의 한 예에 불과하다.

제르베르의 놀라운 학식은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과 새로운 학문을 배울 수 있다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후원자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코 학인으로서의 자유를 저버린 적은 없었다. 학인의 자유는 후원자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 과거, 미지의 땅에 살았던 한 방랑학자의 행적이 작금의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준다면, 학인은 본질적으로 방랑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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