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13. 06:44

학벌이냐 학습권이냐?

  1. 학벌을 바라느냐 학습권을 바라느냐?
    학생에게 학습권(높은 교육의 질)을 말하면 잘 먹히지 않는다. 이해하는 듯 하다가 곧 잊어버린다. 선배 학생의 이해가 후배 학생에게 전달되지도 않는다. 원인은 학생은 입학 때 진입한 학벌과 상대평가 학점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에서 잘 배워 조건이 같은 다른 학생보다 문제 해결 능력이 커진다면 학생은 학벌에서 대학 교육의 질로 가중치를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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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독재 시기에 서강대가 학생을 잘 가르친다고 했다. 스스로 ‘돌을 갈아 보석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수업 강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교육하면서 ‘서강고등학교’라는 소리를 들었다....
    토론 수업을 해보면 15주 중 전반부에는 선생이 가르치지만 후반부에는 선생이 학생에게서 배운다. 실례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왜 높은가를 학생이 여러 학기 동안 토론했다. 학생들은 수출위주 경제가 주된 원인이라고 결론 냈다.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을 비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이 수출을 많이 한 것에 공허한 자부심을 느낀다. 이게 잘못이라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일정한 판단을 한 학생들은 자신이 비정규직이 많은 취업 조건에 대응하여 스스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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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권은 헌법, 교육기본법, 고등교육법에서 권리로 규정했다. 학생을 교육·지도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교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학생이 제기하는 의문점을 존중하여 토론하면 학생은 문제의 본질, 대안, 실현 방안을 집단지성으로 끌어낸다. 학생 평가를 절대평가할 경우 평가를 제대로 하는 것은 물론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것을 몸에 배게 된다. 다른 말로 창의, 다양성,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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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권이 보장된다면 서울대 → 거점 국립대 → 시군소재 대학, 금수저 → 흙수저, 유학생 → 한국 학생 사이에 존재하는 확고한 서열은 서서히 무너진다. 학생이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놓고 연구하고 교육하고 토론하고 대안을 도출하고 이것을 취업을 통해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대학생이 사회 중견이 된 즈음에는 학벌과 교육의 질을 두고 평가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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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은 백년지 대계라고 한다. 한 집안을 두고 보면 이 말이 맞는다. 자녀에게 문제 해결능력을 갖고 도둑질 하지 않게 키운다면 손자, 증손자 대에 가서 집안은 평온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본다면 집단지성 형성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백년보다는 훨씬 더 짧은 기간 안에 교육의 질이 학벌을 따라잡고 곧 추월할 것이다. 이것은 2016,17 촛불혁명에서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