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 17:44

대학자본 재생산의 비밀과 사회적 책임/강수돌


대학자본 재생산의 비밀과 사회적 책임
[오늘, 대학을 말한다-20]
2009년 09월 02일 (수) 14:50:52 [조회수 : 24] 강수돌 .

   
▲스스로 자본이 된 대학, 그 안에는 큰 공부(大學)도, 인간도 보이지 않는다.(사진/이광수)

대학자본 재생산의 비밀 두 가지

원래 교육은 자본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태도와 역량을 북돋우는 일이다. 따라서 교육이란 삶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은 상품이 되었고 마침내 자본이 되었다. 한 사람이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P. 부르디외가 말했듯, 일종의 자본, 즉 문화적 자본이 된다. 또 그 사람이 맺는 다양한 인간관계들도 일종의 자본이 되는데 그것이 곧 사회적 자본이다. 나아가 대학을 졸업한 사람, 특히 일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그 구체적 내용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상징적 자본을 획득하게 된다. 대학 학위를 통해 다양한 자본을 많이 획득할수록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사다리(피라밋) 질서’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더 많은 기득권(떡고물)을 누릴 수 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대학이 돈벌이의 기본 바탕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경제적 자본이 없는 가정의 자녀도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갈수록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학 공부는 어렵게 된다. 이른바 일류대학 진학은 더욱 멀어진다. 요컨대, 경제적 자본 없이는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을 획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P. 부르디외가 계급지배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그 중심에 학교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대학도 엄연히 자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이 된 대학, 즉 대학자본은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어떤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가? 그 비밀의 메커니즘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째로, 대학이 자본 일반의 재생산에 봉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일부(‘자본의 인프라’)가 되는 것, 둘째로, 대학 스스로 자본 증식 기관으로 활동함으로써 그 자체가 ‘교육 자본’이 되는 것이다. 

자본의 인프라로서의 대학

대학이 자본 일반의 재생산에 봉사한다는 것은 대학이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옹호, 지탱, 발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이란 한 마디로 상품 생산을 통한 이윤 추구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 대학이 봉사하는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대학이 자본주의 이윤 시스템, 상품 시스템, 시장 시스템을 옹호하는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부단히 재생산함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은 그러한 헌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나 분야를 없애도록 촉진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나 연구자들도 전형적인 영미 식 경쟁주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입장에 비판적인 교수나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비주류’로 머물러 별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한에서만 암묵적으로 허용될 뿐이다. 따라서 어떤 학생이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고 제대로 된 변화를 갈구하며 ‘경제학 원론’을 수백 번 수강해봐야 대개 허탈하게 헛고생만 실컷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다음으로, 대학이 해마다 생산해내는 고급 노동력이다. 한국의 200여 개 대학에서는 해마다 약 50만 명 내외의 노동력이 방출된다. 개별 자본들은 이 엄청난 노동력, 즉 인적 자원의 창고로부터 입맛에 맞는 노동력을 골라잡으면 된다. 이미 이 인적 자원은 각종 시험을 통해 A급에서부터 E급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갈수록 자본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대학생들은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 같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른바 ‘스펙’ 쌓기에 바쁘다.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예비 노동력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도록 만들기 위해 대학생 스스로 착실히 준비를 해서 갖다 바치려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해도 자본은 쉽게 선택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대학(大學)에는 큰 공부(大學)는 별로 없고 오로지 작은 공부(小學)만 있다. 이렇게 해서 대학은 자본이 요구하는 ‘인재’를 만들어 노동력으로 공급하기 위해 물심양면, 불철주야 노력 중이다.

또한 대학은 개별 자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나 부품, 아이디어, 지적 재산 따위를 부단히 공급한다. 예컨대 인문학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성찰을 하게 하는 것이 옳은 방향임에도 그런 것보다는 세계 시장에서 써먹기 좋은 영어 실력이나 자기 계발, 가족 이데올로기 증진에 신경을 쏟기 쉽다. 또 사회과학에서는 사회 구조가 야기하는 근본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여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돈벌이에 눈이 먼 경제경영인, 돈과 권력에 눈먼 정치가나 법률인 등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기 쉽다. 자연과학에서는 공장에서 요구되는 원료나 상품을 직접 만들거나 아이디어를 주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모든 일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자본과 대학이 협력하여 연구자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해야 한다. 대학마다 ‘산학협력실’이나 유사한 팀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육 자본으로서의 대학

이제 대학은 스스로가 이윤을 추구하는 산업 자본과 다를 바 없이 되어 가고 있다. 일반 회사에 빗대자면 대학도 일종의 ‘교육 회사’가 되어가는 것이다. 교육 회사가 자기 자본을 증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예전에는 그래도 뜻이 있는 자산가가 대학을 세워 학문을 증진하고 후진을 양성하고자 했지만, 오늘날은 초기 투자조차 별로 않은 채, 저금리의 은행 대출을 해서 헐값에 땅을 사고 외상으로 건물을 지은 다음, 나중에 천문학적 등록금 수입으로 하나씩 갚아나가기도 한다. 재단이 출연을 하는 경우라도, 민법과 사립학교법에서 출연 재산을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익재산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많은 재단이 대학을 개인 사유물로 인식해 대학 위에 군림하거나 재단 비리를 초래한다.

이런 차원에서 대학생이 내는 천문학적 등록금은 대학 자본의 재생산에 핵심 역할을 한다. 대학 등록금은 물가 인상률 보다 2~3배 빠른 속도로 올라 20년 전 보다 4~6배나 올랐다. 한 해에 등록금이 1천만 원 내외가 된 것이 현실이다. 그 사이에 대학생 신용불량자는 1만 여 명에 이르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학생들이 막노동과 식당일도 마다않는다.

대학은 이제 학문을 갈고 닦아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에 정의의 빛을 던지는 지성의 산실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이제 대학생 고객에게 교육 서비스라는 상품을 팔아 천문학적 수익을 남기는 교육 자본이 되고 말았다.

이 교육 자본은 좀 특이하다. 대학생 고객이 서비스를 잘 받아 일류 노동력이 되어 일류 직장에 취업하면 나중에 ‘장학금’이라는 형태로 대학에 기부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일반 회사에 가서 훌륭한 노동력이 되어 그 자본의 몸집을 잘 불려주는 경우 ‘평판’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 출신 대학의 주가를 높이기도 한다. 등록금을 올릴 근거이기도 한다.

대학은 전술한 바,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의 산실이자 그 자체가 경제적 자본이 되었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른바 ‘일류대학’들이 ‘일류’라는 가치를 유지, 확대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진리 탐구의 내용이나 방향보다는 그 이미지, 로고, 건물, 이벤트 성 행사, 평판, 여론, 세계 몇 대 대학 등을 중시하는 것도 그 자연스런 귀결이다.

학생들만이 대학 자본의 ‘봉’이 아니다. 교수나 연구자들도 부단히 연구물(그것도 SCI 논문이나 SSCI 논문 같은 것만 대접받는다.)을 생산하거나 대형 연구 프로젝트를 끌어옴으로써 대학 자본의 몸집을 불리는 봉이 되어야 한다. 연구 업적 관리를 더욱 ‘빡세게’ 하거나 연구 프로젝트 수주 시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연구 업적이 높을수록 교육부에서 나오는 지원금, 즉 국민이 내는 혈세를 더욱 많이 끌어 갈 수 있다. 대형 프로젝트는 요즘은 수십억에서 수백억에 이르기 때문에 그를 통해 재단이 스스로 물어야 할 출자금 부담으로부터 면제됨과 동시에 대학 내 각종 프로그램이나 연구팀을 더욱 키울 수 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은 대학 자본의 노동자, 그 중에서도 교수 노동자들을 약 절반 정도는 정규직으로 우등 대우를 하지만, 약 절반 정도의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열등 대우를 한다는 점이다. 대학 강의의 약 절반 정도를 담당하는 시간 강사, 겸임 교수, 비 정년 전임 교수 등이나 각종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시한적으로 고용된 연구교수 등은 대학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학술 활동이나 인간적 교류, 행정적 결정에 참여하기 어렵다. 특히 시간 강사의 경우 방학 중에는 인건비가 지급되지 않으며, 일주일에 한 과목(3학점)을 담당하는 경우 수입이 연간 50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로, ‘비정규직보호법’에서도 보호되지 않는, 주 15시간 미만의 단시간 노동자가 되도록 하려면 시간강사는 한 대학에서 5학점 이상 가르치기 어렵다(고법판결에 따르면, 대학 강의 1시간은 그 연구 준비시간까지 해서 3시간에 해당한다). 이렇게 대학 자본은 정규직 교수들에게는 특혜적 대우를, 비정규 교수들에게는 열악한 처우를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말없는 협력을 얻어내고 다른 편으로는 막대한 이익을 뽑고 있다.

또한 대학은 부동산 관리를 통해서도 자기 재생산을 한다. 실험실습지나 연수원, 학교 부지 형태로 좋은 땅을 사두었다가 그 시장가치가 급등한 경우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또 대학 캠퍼스 안에 쇼핑센터를 짓거나 작은 가게, 식당 등을 입점시킴으로써 고액의 지대를 취하고 있다.

비리 사학의 경우, 2009년 8월 11일 KBS1 TV에서 보도된 바 있듯, 등록금을 마치 제 돈처럼 사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재단 자산 부풀리기에 열을 올리는 경우를 넘어, 전체 학생 수년 치에 해당하는 교비 적립금을 쌓아 놓거나 그 적립금을 펀드에 투자했다 엄청난 평가손을 입기도 한다. 또 학교 시설을 위해 교비로 부동산을 매입한 뒤, 그 등기는 설립자의 지인 명의로 함으로써 사실상 사유화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9년간 교육부 감사를 받은 81개 대학 중 절반이 비리로 적발됐다. 부당 집행한 교비만 약 5천억 원이었다. 놀랍게도 이들 중 교육부가 책임을 물어 재단을 퇴출한 곳은 3곳에 불과하다. 교육 관료들이 퇴임 뒤 사학 재단으로 영입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비리 사학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나 사립학교 설립자 단체 등은 (재단이사회에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개방형 이사, (대학 운영 심의기구인) 대학 평의원회, (문제 재단을 퇴출하는) 임시 이사 제도 등이 독소조항이라며 ‘사립학교법’ 폐지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비리를 저질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학 자본은 스스로 자본이 되었다. 

대학의 사회적 책임성 회복

대학이 글자 그대로 대학(大學)이 되려면 더 이상 돈벌이 시스템의 후원자가 되거나 스스로 돈벌이 시스템이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대학이 그야말로 ‘큰 공부’를 한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진리 탐구다. 오로지 ‘브랜드 가치’나 ‘이미지 관리’에만 쓰이는, 진리, 자유, 사랑, 봉사, 정의, 창의 등의 구호를 명실상부 만드는 것이 큰 공부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학은 무엇이 참된 사회 발전을 위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부단히 연구하고 판별하고 대안적 비전이나 대안 자체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다고 할 때, 지식과 정보, 기술과 기능도 중요하지만, 지혜와 통찰이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 제아무리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 기술과 기능을 배운다 하더라도 지혜와 통찰이 빠져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더 망가뜨리기 쉽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바로 대학의 사회적 책임성 회복에 첫걸음이다.

다음으로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을 하건 안 하건 나중에 사회적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은 학문 탐구 기관이지 취업 준비 기관이 아니다. 대학 졸업자나 일류 대학 출신이 엄청난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는 지금의 ‘사다리(피라밋) 질서’는 타파되어야 한다. 이런 잘못된 질서의 타파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대학 진학이 필요한 사람만 대학을 가게 하되, 대학 등록금은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학생이 무슨 전공을 할지 정할 때는 부모님의 기대나 취업 가망성, 미래 수익 예상 등에 따를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그 내면의 동기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공부, 행복한 연구, 행복한 탐구가 이뤄지고 사회적으로도 행복 증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성 회복에 기초하여 대학과 사회 전체의 ‘사다리 질서’와 습속을 혁파하는 것이 올바른 대학 개혁이지, 단순히 돈벌이 되는 학과를 늘리고 브랜드 관리를 잘 해 돈 잘 버는 대학을 만드는 것을 대학 개혁이라 할 순 없다. 대학 개혁과 사회 혁신이 올바로 될 때, 그때 비로소 사람들도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 받는다.”라는 강박증을 버리게 될 것이다. 반면, 진리탐구라는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고 돈벌이에 성공하는 대학이 많아질수록 학문과 사회는 외화내빈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함께 진행합니다.

 

2009. 9. 1. 08:53

고대 대학원 총학생회 성명서/강사 집단해고에 즈음하여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의 새로운 1년,
  원우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새로운 학생회의 첫 발을 내딛으며

  용산 철거민 문제와 미디어법 통과,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큼직큼직한 사건들과 함께 올해도 어느새 절반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자본의 효율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폭염 속에서 민주주의의 후퇴와 불안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학문을 연구하는 우리들의 고민도 깊어져만 갑니다.
  하지만 새롭게 오늘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더 희망찬 내일을 꿈꿀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연구자로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더불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러한 희망을 안겨줘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Byplayer” 23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는 원우들 곁에서 그러한 학문적 고민을 함께 나누고 삶의 열정을 키워나가는 파트너이자 조력자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이제 막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지난 6월 선거에서 당선된 이래로 신임 집행국원을 모집하고 대학원 현안에 대해 대학원장님과 면담을 진행하였으며, 22대 총학생회 평가와 향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여름LT를 다녀오는 등 새로운 1년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우들의 문제 1: 시간강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

  23대 학생회를 준비하는 과정 내내 들었던 생각은 원우들이 당면한 대학원 내의 문제가 결코 현 사회문제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의 중심에는 세상을 조직해 나가는 강력한 원리인 ‘이윤’의 논리가 학문의 공간인 대학사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학교가 ‘비정규직보호법’의 고용기간 2년 제한 조항을 명목으로 교내 시간강사 88명을 해고한 일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이며, 바로 우리 연구자들이 직면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대학 강의의 절반가량을 맡고 있는 시간강사는 전임강사의 10% 수준으로 한 학기 200-300만원의 강사료를 받고 있으며 그마저도 방학 중에는 받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최소 3개의 수업을 맡아야 생계를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으나 그렇게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강의준비, 강의, 학생상담, 채점, 연구 등 교수·전임강사와 같은 일을 하지만 고용계약서도 없고 4대 보험은 물론이며 연구지원비, 연구 공간, 교재비, 초과 강의료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시간강사의 고용당사자인 대학들은 수백억 원의 이월적립금을 쌓아놓고도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요구에는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한사코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국회에서 대학의 주장을 십분 감안하여 ‘국비보조’를 통해 전임강사의 절반 수준으로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안이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저도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원우들의 문제 2: 높은 등록금, 부족한 장학금, 열악한 연구 공간

  또한 높은 등록금과 부족한 장학금, 그리고 열악한 연구 공간 문제는 너무나 오래된 문제입니다. 대책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정원, 이미 인상될 대로 인상된 등록금, 여전히 부족한 장학금과 열악한 연구 공간 문제를 개선하라는 목소리에도 학교는 언제나 예산부족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세계 100대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등록금을 더 높여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합니다.
  특히 이러한 문제들은 노골적으로 돈이 되는 학문만을 지원하는 학교의 정책으로 인해 기초학문분야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문 고유의 특성과 의의가 ‘이윤’이라는 기준 앞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사회계의 경우 2009년 1학기 기준으로 재학생만 약 2천명이 있지만 개인별 전용연구공간은 4-5석 규모의 학과별 합동연구실,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운영하는 40석 규모의 논문작성자열람실, 그리고 중앙도서관에서 운영하는 29석 규모의 캐럴이 전부입니다. 일반열람실의 경우도 200여석 규모의 대학원도서관 열람실과 120여석 규모의 중앙광장 열람실이 전부입니다. 그 중 24시간 열람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연구공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대학원생 기숙사, 보육시설문제 등은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학교는 수백억 원의 이월적립을 쌓아두고 오늘도 ‘세계 100대’ 대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학교의 몸집 늘리기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목표 안에는 원우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연구 환경을 개선할 방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자유?정의?진리’라는 학교의 이념은 점점 무색해져만 가고 원우들과의 괴리감만 더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입니다.


  원우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총학생회

  “Byplayer” 23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는 앞으로 1년 간 원우들의 곁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먼저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 문제의 당사자가 바로 우리 연구자들이라는 시실을 인식하고 문제개선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종·보건 캠퍼스를 포함하여 모든 원우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밖에도 학술적으로 ‘학술단체지원사업’의 규모를 확대하여 내실을 기하고, 그간 진행되어 왔던 일상적인 복지사업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 학생회가 되겠습니다.
  물론 총학생회의 1년 운영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원우들의 관심과 참여가 함께 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새롭게 개편되는 홈페이지(krgs.korea.ac.kr)와 대학원 도서관 115호에서 만나 뵙기를 바라며, 연구자로서 한 단계 도약하는 의미 있는 2학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Byplayer” 23대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2009. 8. 29. 20:16

"스승이 절실한" 대학에 제자를 보내며/오창렬


"스승이 절실한" 대학에 제자를 보내며
[오늘, 대학을 말한다-19]
2009년 08월 28일 (금) 10:42:00 [조회수 : 55] 오창렬 .

   
▲교문을 나온 고등학생들, 대학에서 진정한 스승을 만났는가?(사진/손정옥)

1. 방랑의 마음

고등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후 ‘대학’은 내게 오랫동안 불편한 대상이었다. 그 불편은 가르치던 아이들을 대학으로 떠나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세상에 왜 대학은 존재하여 나와 내가 정들인 아이들을 떼어놓는단 말인가? 사람의 진정은 간혹 유치함도 무릅쓰는 것이어서, 참담하기까지 한 그 마음을 처음에는 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입생들과의 만남조차 전혀 풋풋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오래되었다. 아이들을 만나 서로 가르치며 배우고 헤어지는 사이에서 내 마음은 오래 방랑해왔다.

선생의 이런 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또 조금 서운하면서도 탓하지 않는 것은 이별 뒤에 남는 섭섭함이란 주로 남은 자의 몫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이별의 감정과 우리의 아이들이 찾아가는 대학이 갖는 지성/ 자유/ 젊음 / 꿈의 이미지는 어떤 줄로도 이을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고 믿는 세상을 내 그늘진 감정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내 마음을 조금 감추고 아이들이 가는 대학에 무지개빛을 얹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학의 의미를 들어 아이들의 꿈을 부풀릴 수 있게도 되었다. 가령 오상순의 시 「방랑의 마음」을 읽으면서 시의 화자가 자리한 ‘바다 없는 곳’을 불모의 공간 ‘고교(시절)’로, ‘안식과 정착’의 이미지인 ‘바다’를 ‘대학(교)/대학시절’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바다’가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고 “안개 같은 바다의 향기(香氣) / 코에 서리”는 합일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화자처럼 “때를 잃”고 “해지는 줄도 모르”는 몰입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와 여기를 잊고 오직 대학에 집중하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 셈이다.

2. 꿈

고등학교 학생들의 막중한 과업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고등학교 교육이 온통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에 쏟아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다른 할 말이 있겠으나, 교육과정상 그것은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한 목표임에 틀림없다. 대학은 ‘큰 학문’을 준비하여 두고 수학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기다리고, 아이들은 그들이 갖춘 능력으로 큰 학문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큰 학문을 매개로 대학과 학생들이 가슴 부풀게 만나는 곳이 대학일 것이다. 그리고 대학과 학생들은 그들의 소망이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성공적이지 못했던 나의 대학생활을 회억하며 나는 대학으로 가는 아이들에게 몇 가지 주문을 하기도 한다. 나의 주문은 주로 독서와 여행에 관한 것들인데, 독서와 여행은 둘 다 길찾기의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고전 독서는 학문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몇 권의 책을 골라보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서는 세상의 사물과 현상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권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부지런히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찾기를 나는 바란다.

책과 여행이 가르침을 주는 추상적인 스승이라면, 대학교의 교수님들은 아이들을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길로 이끌어주거나 도움을 주는 분들이다. 책보다도 여행보다도 스승의 존재가 커다란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스승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숱한 고전 소설들에서 영웅적 풍모를 지닌 주인공들이 세상을 구할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나서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스승을 만나기는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 주인공들은 금강산으로 지리산으로 종종 헤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스승을 찾아 나라를 넘나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다산 선생이 한강가 마재에 살 때 열아홉 살 난 이인영이라는 젊은이가 거대한 책상자를 지고 와서 문장학을 배우고자 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그가 책상자를 지고 온 길은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상상해 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좋은 스승을 만남으로써 학습자는 일거에 혼돈을 걷어내고 밝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진정한 스승을 찾는 여정은 어떤 경우도 험로라 할 수도 멀다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대학은 학교마다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놓고 있어, 옛 사람들의 수고를 엄청 단축할 수 있다. 그 높은 대입경쟁률을 뚫는 것이 금강산이나 지리산을 헤매는 수고에 못지않다 할 지 모르나, 오늘날의 교육제도는 참으로 편리하고도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대학으로 떠나가는 아이들에게 내가 권하는 중요한 한 마디는 선생님들께 적극적으로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들을 괄목상대하기를 소망한다. 자신들의 세계를 찾아가는, 혹은 그 세계를 찾은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인해 내가 눈을 부비게 되길 바란다.

3. 현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대학 현실은 우리의 꿈/기대와 다소 다른 것 같다. 극심한 취업난은 대학에 진학한 이들에게 ‘취업’이라는 화두를 떠안겨 준 듯하다. 학문도 인격도, 젊음도 자유도 ‘취업’이라는 화두 아래서는 한숨과 함께 사라지는 공염불에 그치고 만 듯하다. 취업이 요구하는 절대조건인 영어가 전공을 초월하여 학생들의 전공필수가 되고, 전공과 취업 준비가 따로국밥이 된 현실에서 대학생들이 자기에 맞는 개성적인 길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자신의 길’은 이제는 묵은 길이 되어버렸고, 사라진 길이 되어 가고 있다.

연구를 통해 전문지식을 생산하고 교류를 통해 사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대학의 본래적 기능은 사라져 버렸는가? 대학은 취업준비기관이 되고 대학시절은 취업준비기간이 되어버린 현실에 선 대학생들을 생각하면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취업 미아가 될 것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대학 유급생이 되고자 한다는 그들의 막막함에 비하면 나의 막막함이란 언어적 수사일 뿐이어서 미안하기까지 하다. 그들에게 한때 꿈을 꾸게 했던 선생으로서, 기성세대로서 드는 미안함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면서 대학의 본질적 기능에 대한 의문이 새삼스럽게 드는 것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의 한 구절이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대학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저 시의 ‘늙은 교수의 강의’처럼 대학의 가르침이 만일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거나 현실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깊고 높은 학식으로 당신들의 저서를 우리에게 읽히는 것만으로도 큰 가르침을 주셨던 옛 스승님들을 떠올려보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대학의 풍토가 많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하여 또 만일을 가정하면서 드는 걱정은, 학문과 학생들이 아닌 딴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둔 선생님들이 계셔서 그분들의 취미나 관심이 학생들의 현실과 이상과 동떨어진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대학 교수 비율의 60%가 넘는다는 시간 강사들의 현실 역시 아이들에게 큰 학문을 전달하기 어려운 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학 강사는 젊은 나이에서 나오는 열정과 안정된 신분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어울려 훨씬 더 많이 연구하는 분들이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허약한 신분 때문에 그들이 외부적 요인의 눈치를 봐야한다면, 자신의 신념과 철학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맞춘 교육을 해야 한다면, 그들의 강의가 아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비판과 애정의 시각을 길러 줄 수 없다면, 학생들은 누구를 바라보며 저 힘든 대학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저렇게 학문이 죽고 대학이 죽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앞길은 어떤 진실과 진리로 밝힐 수 있을 것인가?

4. 소망

만일 사정이 내가 짐작한 대로라면, 난 언어로나마 소망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가장 확실한 빛은 반성이 전제된 현실자각과 우리가 사람이라는 자각을 하는 데에서 비롯할 것이다. 우리의 항해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길을 찾는 가장 빠른 길을 처음으로 돌아가 지도를 살피는 일일 수 있다. 우리가 지도를 잘못 그리지 않았는지를 점검하듯, 우리가 대학을 가고자 했던 동기나 목표를 점검해 볼 일이다.

혹시 무슨 대학을 졸업하면 만사형통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무슨 학과에 진학해서 어떤 과정들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따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나만 잘하면 되겠지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스승이다.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그리고 자신이 걷는 길과 거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로 보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내 문제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보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 사회가 변화하고 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놀라운 지점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역사통속강화>에서 최남선은 “흩어져 있던 개별 인간이 점차로 집단을 이루어 집단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공통한 감정과 공통한 욕구로써 공통한 목적을 위하여 공통한 정성과 힘을 기울이는…집단생활의 여러 단계를 골고루 밟는 동안에 감정의 순화(醇化)와 지능의 속달(速達)을 이룬 자가 문화의 강자로 세계에서 큰 체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어공부보다, 취업준비보다 우리가 배워야 할 ‘큰 학문’은 이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대학생다운 모습이 아닐까?

오창렬 (시인, 상산고등학교 교사)
사진 손정옥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함께 진행합니다.

2009. 8. 26. 19:28

시간강사들이여,주눅과 자존심에서 벗어나자!/박주현

시간강사들이여, 주눅과 자존심에서 벗어나자!
[오늘, 대학을 말한다-18]
2009년 08월 25일 (화) 14:36:26 [조회수 : 85] 박주현 .

   
▲시간강사들이여 단결하라 !(사진/이광수)

이제 시간강사 3년차가 감히 푸념과 넋두리를 끄집어 내놓으려니 부끄럽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십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암울한 비정규직 그늘을 묵묵히 수행하듯 걷고 있는 선배님들 앞에 우선 죄송하다.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해 온 사이 상아탑 내부의 고학력 비정규직 암운은 더욱 짙어만 졌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학 당국은 그렇다 치자. 그동안 부끄러워서, 아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애써 외면했던 시간강사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반목과 갈등을 애써 피해 온 사이 고뇌와 주눅만 깊이 패이지 않았던가. 참여관찰자 입장에서 그들 주변의 애환을 미시적으로 풀어 나가고자 한다. 수많은 침묵자들의 관심과 결속을 위해....

보따리강사 이야기

지난 2월 26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첫 연재기사를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프롤로그를 정리해 올린 내용이다. 서투른 글은 그 후 계속 이어졌다. 사실 고백하건데 재미있어서 쓰기 시작한 글은 아니었다. 연재기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강사 3년차나 10년차나... 자존심 먹고 살라?”
"교수님 왜 학생식당에서 라면 드세요?"
“시간강사, 교과부 눈엔 유령으로 보이나?”
“교수가 되려면 목사추천서부터 제출하라고?”
“왜 대학광고가 <조선>·<중앙>에 많이 나오죠?”


‘보따리강사 이야기’란 주제로 시작한 글의 제목들이다. 어느덧 10회를 훌쩍 넘겼다. 어쩌다 비정규직 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지성의 요람인 대학사회에서 오랫동안 방치돼 왔던 문제를 기성언론들은 취급조차 하려들지 않고 있다는 데서 오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특히 비정규직 강사문제를 대중매체, 특리 거대 보수언론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 분야가 됐다. 그래서 진보매체인 <인터넷신문>을 택해 대학사회에 늘 그대로 방치된 채 수 십 년이 흐른 비정규직 강사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알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시작한 글이었다.

어리석은 질문과 고발인줄 알면서도 시작한 글은 의외로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란 모토로 창간한 인터넷 매체가 지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피드백은 매우 다양하고 빨랐다. 댓글과 이메일 등으로 많은 제보와 고언, 질책 등이 쇄도했다. 이러한 반응 때문에 글을 멈출 수 없었다.

연재가 멈추는가 싶으면 같은 처지에 놓인 강사들과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 전공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 심지어 인터넷신문사 편집자로부터 독촉전화까지 다양한 관심을 보여 큰 위안이 됐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취조나 다름없는 대학당국의 압력

한 지방대학에서만 강의를 하고 있는 필자에게 은근히 압력이 가해오기 시작한 것은 거시적인 고등교육법 문제에서 미시적인 대학내부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무렵이다. 대학에 출입하는 기자와 대학홍보 관계자의 집요한 취재가 시작됐다. 취조나 다름없었다. “관련 기사의 사진이 왜 우리지역을 배경으로 했느냐?”,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대학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데 우리대학에 포커스를 가했느냐?”, "잘리면 어쩌려고 비판적인 기사를 계속 쓰시나?" 등 항의성 질문과 압력은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반복됐다.

그런 와중에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특위 김동애 위원장의 기사가 나가면서 주변에선 더욱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국회 앞 텐트농성이 수년간 지속되고 있고 일부 대학 분회에선 1인 시위가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연쇄적인 현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인지 ‘좋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용기를 심어 준 반응이 더 많았다. 인터넷 매체에 필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강사들의 글이 잇달았다. 반응이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조심하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나 홀로 느끼는 문제가 아니었다

김영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고대분회장은 국회 앞에서 부인과 함께 600일 넘게 투쟁을 벌이면서도 틈틈이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생 수업권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개정 투쟁 소식지'를 보내왔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란 걸 매번 느낀다. 덕분에 기사가 올려 질 때마다 많은 격려의 글도 쇄도했다.

시간강사여 일어나라. 사람이 자살했는데... 심각한 문제 아닌가?
당장 작은 이익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연대를 선택해야 된다.
젊은 강사들에게 연구기회를 많이 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실력 없는 교수들을 내보내야 한다.
학생과의 관계에서 피해의식을 없애라.
이 문제를 방치하면 '실력' 이데올로기도 무용물이 된다.

나 홀로 느끼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많은 학생과 강사들의 격려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부산대 한 시간강사는 쥐꼬리 강사료 문제로 비정규 강사들과 학교 측이 벌이고 있는 기막힌 사연을 <오마이뉴스>에 소개해 많은 격려의 댓글이 쇄도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학의 한 시간강사는 학생들과 교수 사이에서 갈등과 번민을 거듭하며 묵묵히 강단을 지키고 있는 시간강사들의 고된 현실을 고발해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글이 올라가면 조회수가 가히 폭발적이다. 단숨에 10만 건 이상을 육박하는 글도 있다. 7만여 대한민국 비정규직 교수들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국회 앞에서 장기간 텐트를 쳐놓고 희생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소식이 전해 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 달라진 건 없다.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목소리

그동안 어려운 환경에서도 긴 투쟁을 펼쳐온 선배님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한다. 체계적으로 투쟁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소식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동안 600일 넘게 지속돼 왔지만 이제야 관심을 갖게 되다니. 해서 솔직히 미안하고 부끄럽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이제부터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밀알이 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대학강사들은 학과 조교나 교수들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학기 강의배정에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길이 아님을 본인들이 아마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은 목소리가 합치면 큰 메아리를 얻을 수 있다. 16대에 17대 국회 때 자동 폐기됐던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18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아직 구체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강사들에게 교원지위를 되돌려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강사의 형태로 교수진을 무한정 고용해, 교육과 연구 양쪽 모두에서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대학들의 아비투스(habitus, 습속)가 문제다.

대학의 교양과목 중 7할 이상을 시간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국감 때마다 제기돼 왔다. 시간강사로 전체 교양과목의 절반 가까이를 채우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교원확보로 교육과 연구를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대학'이라며 입학철마다 각 대학 홍보담당자들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시간강사들을 두 번 울리는 꼴이거니와 학생들에겐 명백한 허위 과장광고에 해당된다. 그런데 죄목은 충분하지만 처벌은 없다. 그 어떤 시도조차 없이 우리는 그저 상아탑의 음습한 그늘에 갇혀 있을 뿐이다. 결국 당사자인 우리들 스스로 나서야 할 문제다. 결속해야 한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을 모조리 굶길 순 없지 않은가?

박주현 (언론학 박사/ 대학강사)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함께 진행합니다.


2009. 8. 26. 19:23

Demand for Revocation of the 88 Lecturers Laid off by Korea University

Greetings.

 

This is the news of the demand for revocation of the 88 lecturers laid off by Korea University.

It is understood that 88 lecturers from Korea University, and 5,000-10,000 lecturers in the whole country, have been the victims of lay-offs.

If it was a typical company those who were fired could fight and in the case of Ssangyong Motors, they fought and were able to achieve a half-victory. However if a fired lecturer fights, in the academic world that lecturer would be labelled as a troublemaker, and it would be the end of his career. It is worse than simply being put on a blacklist. Even I myself teach every semester with the thought that it may be my last one to seek university normalization. So even though all of the 88 lecturers are as one in resenting the dismissal, they cannot step forward to fight it.

One laid off lecturer says: I don't want to lecture anymore. Another lecturer who has a PhD says: My child are just two so I can't speak up. Another lecturer said to his department, I received to teach three courses in the second semester; but I can't teach any longer because I can't stand this Korea University which only gives lip service to academic freedom and conscience'. The department said it was struggling with the university so they should be a little patient.

On Koreapas (koreapas.net) one laid-off lecturer's wife posted the desperate words below, on 8. 23:

The following is what i posted online on July 10 on the university homepage's Cyber-inspection room for online petitions. Since I received no reply I posted it on the free bulletin board, but maybe because it became old it has been removed and I am re-posting it here. Whatever is the reason we need a cyber-inspection room, if they simply ignore what people post without responding at all? It would be less embarrassing if they simply got rid of it....

'I am the wife of an hourly paid lecturer who is teaching at your esteemed university.

A few days ago, my husband was contacted by a department professor who told him that since he has worked over 4 terms in the second semester he would be dismissed.

The department professor told him, this instruction was passed to them through an official notice from the university central department in relation to the irregular worker act.
What I don't understand is, my husband already received the instruction to proceed teaching in the second semester at the end of the first semester; the teaching schedule for the second semester has already been posted and students' course applications already received, and the irregular worker act does not even apply.

That even a famous private university, Korea University which is called the people's university, would do this kind of excessive and rude act is a fact that makes me angry and miserable.

I even think that now there are no longer any teachers existing, who think of education seriously. It only inspires disillusionment and contempt that, in this country, the university itself is the place that is turning a large number of hourly lecturers who are responsible for education, into a socially weak and marginalized class.

I hope that you can abandon the false image of authority which is not even recognized, and wake up and clarify this for us.'

Even though he had no security for his future, my husband lived with fulfillment from teaching his students and juniors. But now I see that he has lost all motivation and as his wife I feel anxious and insecure.

I feel, it is not right to use and dispose of a person like this.

I feel, it is not right to ignore even the students' right to study as they choose, like this.

I wonder, as an alumnus of Korea University myself, whether I should just accept all this, and so I ask for the rest of the Korea University community for your thoughts...

***
On August 21, 10 a.m., in front of the central Anam Building of Korea Univerdity,  a press conference titled 'Please let us have our teachers back!' was held by Korea Univ student unions, where over 40 people attended, including Chung Tae-ho, president of  Anam Campus of Korea Univ. student union, Lee Sae-ra, vice president of Sejong Campus of Korea Univ. student union, representatives of College of Political Economy, representatives of College of Liberal Arts, Kim Dong-ae, head of Central Struggle Committee for Restoration of University Teacher Status of University Lecturers and Normalization of University education, Song Hwan-woong, vice director of National  Association of School Parents for Genuine Education, Do Chun-soo, president of Korea University Democracy Alumni Association, and others. Reporters from several media attended including MBC, SBS, YTN, Seoul Newspaper, Hangook University Newspaper, Korea University Newspaper, Bae Lusia Internet, etc. and YTN has reported on it.

Korea University union local leader Kim Young-kon said, 'Whether from the aspect of the irregular worker protection act or raising the quality of lecturers, there are no grounds for dismissing the lecturers.' Vice director Song Hwan-woong said 'Apart from university entrance, if you want to improve the quality of university education and university lecturers, the dismissal of the lecturers must be revoked and their status as university teachers restored. President Do Chun-soo said, 'Korea University must restore the jobs of the dismissed lecturers, and vice president Lee Ki-su of the Korean University Association should join in calling for the restoration of university teacher status to lecturers.' President Jung Tae-ho said, 'Give back our teachers.' Vice president Lee Sae-ra said, ' The dismissal of our teachers is unfair and we demand revocation of the dismissals.' Resolutions continued to be read out and shared.

 

 

****

You can send a letter to want revocation of laid-off lecturers of Korean University to below emails.

President of Korea University Lee Ki-su, e-kisu@korea.ac.kr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Lee Myung-bak,  webmaster@president.go.kr

Minister of Education, Science and Technology, Ahn Byung-man, webmaster@mest.go.kr
Head of Korean Council for University Education & President of Ewha University, Lee Bae-yong. master@ewha.ac.kr

Head of the Committee for Education and Science & Technology of Korean National Assembly, Lee Jong-kul, anyang21@hanmail.net 

 

 

Kim Young-kon, Korea University union local leader

Kim Dong-ae, head of Central Struggle Committee for Restoration of University Teacher Status of University Lecturers and Normalization of University education

2009. 8. 25. 08:11

17 학운이 사그러든 한국의 학문/홍기빈

학운이 사그러든 한국의 학문
[오늘, 대학을 말한다-17]
2009년 08월 18일 (화) 11:47:32 [조회수 : 112] 홍기빈 .

   
▲키메라와 같은 비정규직 교수 체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진/이광수)

막스 베버의 유명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초두에는 독일 대학 소장 학자들의 처우와 미국 대학 소장 학자들의 처우에 대한 비교가 나온다. 그가 강연을 한지 1세기가 흘렀건만 한국 대학의 현실을 보면 바로 오늘 일 같아서 아니 1백년전에도 보지 못했던 극악한 체제가 시행되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온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아직 대학에서 정규 교수직을 잡지 못한 이들은 ‘사강사(Privatdotzen)’라는 지위로 강의를 한다. 사강사는 대학에서는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한다. 그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강의료를 받을 뿐이다. 그 대신 사강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관심사에 따라 원하는 내용으로 강의를 조직할 수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박사학위를 마친 젊은 학자들이 ‘조교수(assistant)’라는 명칭으로 임시 채용된다. 그는 대학에서 정규적인 봉급(salary)을 받지만, 그 대신 그가 가르쳐야 하는 과목의 내용과 방향은 학과에서 주어진다.

어의 없는 위선에 기반한 학문추구

베버는 두 가지 경향 모두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독일에서 학제란, 대학에서 학문 추구가 학자들의 실제 생계와 같은 ‘세속적인’ 문제와 별개라는 어이없는 위선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베버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신은 크게 운이 좋아 교수 자리를 얻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학자들 - 실로 누구인지 궁금하다. 짐멜(Georg Simmel) 이야기일까? - 이 그런 운이 없어서 학운이 사그러들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미국의 제도 또한 베버는 암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근대 세계의 집단적 합리화 과정에 맞추어서 학문 추구 또한 하나의 기업이나 공장과 같은 집단적 작업 공정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강연의 내용에서 베버가 하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있는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란 사실상 중세 승원의 수도승과 같은 인생의 헌신이니, 두 제도 모두 베버의 마음에 썩 들리는 없다. 하나는 낡은 귀족주의 시대의 허위에 찬 위선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펼쳐지기 시작한 회색빛 공장 사회의 모습이니까.

그런데 베버가 2009년 한국 대학의 모습과 그 속에서 비정규직 교수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독일의 낡은 귀족주의와 미국의 차가운 현금 관계라는 양쪽의 나쁜 것만 합쳐놓은 제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무어라고 할까?

강의 제의 받고서야 부랴부랴 공부하고 커리를 짜야..

한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4대 보험을 필두로 하여 아무런 신분 심지어 교원으로서의 신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받는 ‘강사료’란 사실상 대학의 재정에서 지급되는 돈이라기보다는 강의를 받는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갹출한 돈이고 이를 대학 행정실에서 중간 업무를 해주는 정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강의가 없으면 강사료도 없고, 그들은 전통 사회의 ‘고고한 학자’마냥 이슬과 공기를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라는 위선을 강요당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강의 주제 선정과 내용 결정의 권한이 있는가? 여기에서 오늘날 한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미국의 젊은 학자들과 같은 신세가 된다. 강의의 주제는 학과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며, 이 과목 강의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일방적으로 제의를 받을 뿐이다. 생계나 여러 걱정에 몰린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러면 그때부터 부랴부랴 책과 논문을 쌓아놓고 공부를 하고 커리를 짜야 한다. 요컨대, 한국의 비정규직 교수들은 경제적 대우의 차원에서 보면 19세기 독일 대학의 관행에 있으며, 대학의 교육 및 연구 활동에의 참여라는 차원에서 보면 20세기 초 미국 대학의 관행에 묶여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대학들, 쌈짓돈 쟁여서 자본 시장의 큰손으로

도대체 19세기와 20세기 대학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제도가 어떻게 21세기에 떳떳이 실현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상황을 더욱 놀랍게 하는 것은 21세기 한국의 대학들이 너나없이 내걸고 있는 구호, 즉 ‘학문 경쟁력 강화’ - 여기에 엉뚱하게 ‘글로벌’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붙는다 - 라는 것이다. 이를 명분으로 하여 대학 등록금은 계속 올라가고 정부에 대한 각종 지원금의 요구도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또 많은 대학들은 쌈짓돈을 쟁여서 아예 자본 시장의 큰손으로까지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지적하였으므로 더 이상 상론할 필요가 없겠으나, 막상 그 대학 활동의 핵심이라 할 교육과 연구의 절반 이상을 전담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는 19세기 독일 대학의 사강사 지위를 강요하고 있다.

처우만이 문제가 아니다. 현재 급변하고 있는 21세기의 지구적 사회에서 20세기 중반 정도에 틀이 잡혀 있는 학과 편제나 대학 교육 내용이 쉽사리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무척 많다. 따라서 교육과 연구의 내용이 현실을 따라잡고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실속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강의의 기획과 내용 채우기가 아주 섬세하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정규직 교수들이 선택하고 남은 과목들을 뒤치다꺼리로 비정규직 교수들이 맡아하는 형국이다.

물론 정규직 교수들도 연구 작업에 몰두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러한 보조적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비중이 강의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거나 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규직 교수들이 새로이 연구 작업에 착수할 능력과 의욕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주제들, 그리고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하지만 과도한 부담의 과목들이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이다. 사실상 ‘글로벌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한국 대학들’의 현황은 연구와 교육의 기초 부분을 헐어내어 엉뚱하게도 ‘자본을 축적’하는 엉뚱한 기관으로 바뀌는 형국이다.

 ‘전임 자리’를 둘러싼 무형의 규칙

이렇게 눈에 보이는 제도는 턱없이 불합리하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가 있다. 그것은 해방 후부터 한국의 대학 사회에 자리잡은 소위 ‘전임 자리’를 둘러싼 무형의 규칙이다. 사실상 일본 대학을 통하여 19세기 독일 대학의 알량한 귀족주의적 교양주의가 들어온 것에 불과하지만, 대학 강사란 ‘전임 자리’를 잡기 전 몇 년간 해당 학과나 학계의 ‘학문 공동체’에 조용히 봉사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21세기에도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봉사의 생활이 길어진 나머지 머리가 벗겨지고 아이가 중학교를 들어가도록 시간 강사를 면치 못하는 상황을 사방에서 보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 교수들의 다수는 아마 이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허위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간단한 시장의 법칙 교수 채용 시장에 나오는 박사학위 소지 공급자는 넘치고 있으며, 대학 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나오는 목소리는 오히려 비정규직 교수들 사이에서 가장 낮은 듯 하다. 그런 생각이 허위 의식인 줄 알아도, 사실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법칙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가까운 후배가 몇 년 전 열심히 비정규직 교수들을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 친구가 부닥친 가장 큰 장벽은 본인들 스스로의 패배주의였다. 지금 한국 대학의 어처구니없이 불합리한 19세기/20세기의 키메라와 같은 제도가 계속 용인되고 있는 것은 물론 자본 축적 기관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대학 당국 자체도 원인이지만 피해자이면서도 패배주의와 일각의 기회주의까지 겹쳐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도 있다고 생각된다.

대학 사회의 상층의 이익에 따라 버무려놓은 지금의 비정규직 교수 체제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던 당시 내가 보았던 캐나다 대학의 ‘강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강고한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원 지위는 물론이고 노동 조합 자체 내로 여러 종류의 수당과 보조금을 위한 기금도 운영하고 있으며, 학기마다 조합원 모두가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강의가 고르게 분배되도록 조치하며, 필요할 경우엔 강좌의 개설을 학교에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물론 한 사람의 강사가 담당해야 할 학생의 숫자와 채점 및 강의 시간 등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규정된 단체 협상을 해놓았기에 그 기초에서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노조는 개별 대학 별 노조도 아니다. 크게는 전국의 대학 교원들을 모두 포괄하는 일종의 산별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상급 기관으로 캐나다 공공 노조(CUPE: Canadian Union of Public Employment)의 산하에 들어있었다. 대학 당국도 이들이 대학의 교육과 연구의 핵심적인 일익을 담당하는 주체임을 충분히 인정한다.

서두의 이야기는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으로 시작하였으니 끝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프랑스 혁명과 앙시앙 레짐]으로 나가고자 한다. 토크빌이 진단하는 프랑스 구체제의 문제점은 성격과 정당화 논리가 상이한 여러 위계 제도가 착종(錯綜)되면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불합리이다. 왕정과 그 주변의 궁정 귀족들 그리고 지방 귀족들은 한편으로 봉건 시대의 황당한 논리들에 기댄 지배 체제를 구성해놓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갑고 냉혹하기 짝이없는 현금과 화폐의 논리로 인민들을 또 쥐어짜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작동 논리가 상이한 위계 제도들이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무조건 위계 서열의 위쪽에 있는 이들의 이득과 권력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강요되고 지속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키메라와 같은 체제가 어떤 논리로 장기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혁명과는 거리가 먼 보수주의자 토크빌조차 여기에서 프랑스 혁명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보았다. 19세기 독일 대학과 20세기 미국 대학의 불합리한 점만 취하여 대학 사회의 상층의 이익에 따라 버무려놓은 지금의 비정규직 교수 체제는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정당화될 수 있을까.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국제정치경제학)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함께 진행합니다.


2009. 8. 25. 08:06

16 정규직 대학 교수 사회를 보면서 목 놓아 운다/이광수

정규직 대학 교수 사회를 보면서 목 놓아 운다.
[오늘, 대학을 말한다-16]
2009년 08월 12일 (수) 21:25:32 [조회수 : 338] 이광수 .

   
▲교수의 탈을 쓰고 있다고 모두 다 교수는 아닐 것이다.

교수란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연구와 강의를 주로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학생들과의 상담을 통해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직업인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교수는 대개 최소 매년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기관에서 인정하는 학술지에 1편 이상의 논문을 쓴다거나 아니면 최소 3~5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연구한 성과를 책이나 다른 형태의 결과물로 생산해낸다. 강의는 보통 1주일에 9시간 이상, 일주일에 나흘 정도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1년에 4개월의 방학을 갖지만 대개의 교수는 또 다른 연구나 새로운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그 시간을 사용한다.

운 좋은 경우이겠지만, 스물다섯이나 여섯 정도부터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하고 서른다섯에서 마흔을 전후로 하는 나이에 정규 교수로 부임한다. 교수가 된 후 5년 정도가 지나면 4천만 원, 10년 정도가 지나면 6천만 원의 급여를 받다가 60세 정도가 되면 1억원 정도의 급여를 받으니 대기업이나 공기업보다는 적지만 웬만한 기업 이상의 대우는 받는다. 그래서 교수로서 먹고 살고 자식 교육 시키는 데에는 큰 지장을 느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신이 내린 직업이라고까지는 말을 할 수 는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것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신이 내린 직업인으로서의 교수가 있다. 요즘 신임 교수가 되는 경우는 조금 다른 경우이겠지만, 2002년 이전에 교수 임용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정말 부끄럽고 처참한 행태를 일삼는 교수가 많다. 특히 임용 후 5~6년 정도가 지나면 거의 자동으로 오르는 부교수 혹은 정교수 같은 정년 보장 교수 가운데 이런 경우가 많은데, 교수로 부임한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논문 하나 쓰지 않거나 흔한 책 한 권 내지 않고 완전 무위도식으로 일관하는 교수가 각 대학마다 부지기수다. 논문 하나를 내면 제목만 바꾸어 서너개로 뻥튀기를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고, 심한 경우는 그걸로 수 천만 원에서 수 억의 프로젝트를 따 내는 경우도 많다. 그런 교수 가운데 연구를 하지 않고 강의라도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강의에도 무성의하다.

그들이 갖는 관심의 대분은 학교 보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주로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동료 교수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각종 동문회나 향우회 모임에도 항상 얼굴을 내민다. 대개 집에 돈이 많거나 고등학교나 대학 동문 가운데 돈 꽤나 있는 친구들을 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연구나 강의 준비에 시간을 쓰지 않고 그 시간에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호탕하고 대범하게 돈을 뿌린다. 세계관에는 원칙이라는 것은 없고, 항상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보고 사람들은 대개 원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인지 ‘그렇기 때문에’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연구도 하지 않고, 실력도 없지만 대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탄탄하다. 그들에게 대학 교수는 신이 내린 직업일 수밖에 없다.

그런 교수들은 주로 처장이나 학장 혹은 원장 혹은 나아가 총장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대학 밖에 있는 시민들이 대학의 총장 선거판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면 웬만한 비위 좋은 사람도 구역질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그렇게 해서 대학 총장에 당선되었다거나 그 밑에서 무슨 처장이나 원장직을 따낸 교수들을 사회에서는 매우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런 교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더 큰 권력을 탐하여 정계를 기웃거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대학 교수라는 지위는 이미 갖추었고 거기에 무슨 총장이니 학장이니 하는 직함까지 갖추었으니 정치로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존경 받고, 정치판을 좌지우지 하니 한국 정치가 잘 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다.

그렇지만 대학에 그런 교수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소수지만 50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도시락을 둘 싸가지고 다니면서 연구실과 강의실만 왔다 갔다 하는 교수도 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물론이고 방학 기간 내내 연구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책상 앞에 너무나 오래 앉아 연구만 하다 보니 몸에 허리 디스크 병을 앓거나 더 큰 병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교수들은 대부분 학생들의 미래를 염려하고 그들을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학생들과 상담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고, 학생들이 실력을 쌓기 위해 방학 중에도 특별 교육을 시키며 심지어는 졸업 후에도 수시로 불러 모아 공부를 봐주는 경우도 많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어 그들의 세계관을 일률적으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수로서는 부끄럽지 않게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학생 상당과 사회 봉사의 부문에서 원칙적이고 양심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학문의 물질에 대한 독립을 견지하게 위해 프로젝트로부터도 애써 멀리 떨어져 연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은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연구를 위해 사재를 털어 가며 후학들과 공동 연구를 하거나 소수 학문을 위해 저널이나 연구소를 만들어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려 애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변변한 재산조차 남긴 게 없어 은퇴 후 쓸쓸히 여생을 살아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은 회갑이나 정년을 맞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논문 하나씩 모아 논문집을 봉정하는 것조차도 후학들에게 신세를 진다 하여 고사하는 딸깍발이다. 그들은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몇 년 간 혼신의 힘을 다 해 홀로 연구에 몰두해 책을 써 학계에 바치고 떠나는 이 시대의 스승이자 어른이다.

대학은 대개 이와 같은 두 부류의 교수와 그 사이에 낀 다수의 교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 즉 전혀 교수답지 못하는 자들이 후자 즉 양심적인 교수와 대다수의 교수를 압도하는 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권력을 잡은 후 그 행하는 행태가 동네 양아치들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보다 큰 권력과 결탁하여 교수 임용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니 시간이 갈수록 그 주변은 불나방 같은 교수와 교수 지망생이 들끓는다. 그리고 그 패거리의 힘은 갈수록 막강해진다. 물론 그 패거리에 포섭되는 대상으로 학생이라고 빠질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입바른 소리 좀 하는 교수는 대학 당국이나 부패한 일부 학생 집단으로부터 협박이나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적잖이 생기며 그러면 결국 유약하지만 정상적 사고를 지닌 교수들은 입 닫고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업으로 삼은 역사학자는 많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철학자는 많지만, 시대의 옳고 그름에 고민하는 역사가나 철학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난, 그러한 사실을 보고 슬피 목 놓아 울 수는 없다. 죽은 지식이라도 좋고 무의미한 논문이라도 좋다. 유약하고 비겁해도 좋다. 최소한의 연구물이라도 생산해내고, 정해진 수업 일수만이라도 잘 지켜 강의에 충실하고, 최소한의 따뜻한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교수들이,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만이라도 갖춘 보통의 교수들이 내는 목소리가 상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 대학이 되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줌도 안 되는 패거리들이 모여 권력을 탐하고, 상식을 유린하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그 번지르르한 직함을 타고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 오늘 한국의 대학이다. 난, 그것에 목 놓아 울 뿐이다.


글/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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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5. 08:01

15 희망의 인문학, 대학의 비판적 정신과 삶/박만엽

희망의 인문학, 대학의 비판적 정신과 실천적 삶
[오늘, 대학을 말한다-15]
2009년 08월 10일 (월) 08:55:54 [조회수 : 227] 박만엽 .

   
▲ 그동안 나는 박제화된 지식을 대학생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는가?(사진/이광수)

봄기운이 완연한 요즈음 대학 캠퍼스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게다가 부지런히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대학생들의 유쾌한 움직임들을 보면 필자로서는 그저 젊음이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런 풍경에 대한 부러움은 대학을 평면적으로 바라본 관찰자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이 안고 있는 속사정을 입체적으로 볼 것 같으면 상황은 다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조심스럽게 자문해 본다. 과거 386세대로 상징되는 대학생들과 오늘날 대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현재 대학생들이 접하는 공부와 정보의 양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자신의 전공 분야는 물론 비전공 영역에까지 스펙을 넓히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의 능력 지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향상되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눈에는 오늘날 대학에서 비롯되는 상황이 그렇게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비판정신이 실종되었다. 주된 이유로는 학문을 취업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적을 자기성찰, 자존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지혜,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 등과 같은 덕목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하는 말은 이제는 상투적인 도덕 교과서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효율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적자생존이라는 늪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구조적 원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구도가 우리 사회 전반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비단 학교뿐만 아니라 기업, 사회, 병원, 군대 등과 같은 조직 사회가 적용되는 곳에는 자본의 논리가 모두 적용된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대학입시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특목고 혹은 외고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치졸한 현실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학문의 진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인문학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숭고함을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이러한 현실의 벽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잃어버린 대학의 비판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되찾을 수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큰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대학이 올곧은 비판의 목소리를 낼 때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학의 근거와 존립 이유를 주장하는 다음의 글은 오늘날 대학은 물론 대학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 모두가 가슴 깊이 새길 대목이라 생각한다.

“지식의 어둠을 축출하려는 노력, 기성의 체계라는 이유만으로 용인되어 있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비판 정신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이미 사실로 굳어져버린 것의 외피를 벗기고 그 내용을 심문하는 것도 바로 이 정신이다. 따라서 비판 정신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 가운데서 한 몫을 얻으려는 비럭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회가 이미 마련해두고 있는 이권에 편승하는 기술도 전통이란 이름으로 보장된 가치 체계에 비집고 들어가는 약삭빠른 재주도 아니다. 기존의 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 역사적인 사실을 진리와 혼돈하는 것, 의의와 근원성을 물어보기도 전에 이롭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무엇인가를 긍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반비판적인 것이다.” (김열규, <대학의 근거>)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필요에 순종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이는 대학과 대학구성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공공의 선을 추구하려는 실천의 힘이 요구된다. 두툼한 외피 속에서 자란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본연의 생명체로서 탈바꿈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대학은 스스로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외피를 벗을 때가 되었다. 실천의 힘은 곧 변화의 원동력이다.

희망의 인문학,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자란다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즈음 진리의 상아탑으로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이 변하고 있는 고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례가 한 가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이 그것이다. 사회에서 없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아 온 빈곤층, 노숙인, 전과자들에게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을 통해 반성적 사고를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과거 상아탑의 세계에 안주하던 대학이 이제는 거친 마찰이 있는 현실 세계에 인문학을 통해 실천의 힘을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원래 1995년 미국에서 얼 쇼리스가 뉴욕 로베르트 클레멘트 가족보호 센터 회의실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에서 노숙인, 빈민, 죄수 등 31명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얼 쇼리스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성찰적 사고를 통해 가족에서 이웃과 지역 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지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인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3년 전부터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으며, 올해는 서울시가 4개 대학(서울 시립대, 경희대, 동국대, 성공회대학)에 교육을 위탁해 지원의 폭을 넓혔으며 교육을 받는 수강생들도 대폭 증가되었다. 나라마다 풍습과 환경, 규범이 다른 것처럼,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다른 면모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과정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참가 수강생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양시키는 것을 강좌의 목표로 삼았다. 희망의 인문학 과정에 참여하는 필자 역시 이러한 교육 목표를 염두에 두고 수강생들에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깰 것을 요구했었다. 이 때 나온 매서운 질문 하나.

“교수님, 인생의 벽을 어떻게 깰 수 있죠?” ……
“인생의 벽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있고 앞으로도 괴물처럼 계속 우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매번 그러한 벽이 나타날 적마다 과거 체험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보듬어 안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다시는 너 같은 벽하고는 놀지 않을거야’ 라고 말하면서 그 벽을 에둘러 가십시오. 익숙한 것과의 결별만이 새로운 삶의 질서를 볼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깨기 위해 혹은 그것을 깰 때마다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사고와 삶이 나아갈 수 있는 경계를 확장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정말로 대학의 강의실에서 느끼지 못했던 실천의 힘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강의를 마친 후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다. ‘마치 편의점에서 진열되어 있는 삼각 김밥처럼, 그동안 나는 박제화된 지식을 대학생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이때 머릿속을 스치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 한마디. “항상 영민함의 척박한 산정에서 내려와 어리석음의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라.”

어둠의 자식들을 자본의 논리로 조롱하는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공공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다. 효용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이라는 합리화의 덫에 걸린 대학들이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조직과 체제의 이익만을 쫒는 이기적 유전자들의 집합에 도전하고 저항할 수 있는 이른바 상식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실천적 힘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

박만엽 (서울시립대)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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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4. 09:01

해고 고대강사가 불안한 아내/고대총학 기자회견

고대에서 강사가 88명해고되고 전국에서 5천-1만여명이 해고당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일반 기업체 같으면 해고되면 싸우고 평택 쌍용자동차도 싸워서 절반의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해고 강사가 싸우면 학계에서 "그 사람 따지는 사람이야"하면 끝장입니다. 블랙리스트보다 더 합니다. 저 자신 매학기 대학정상화를 향한 마지막 학기라는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그래서 88명이 해고됐지만 하나같이 억울하지만 나서지 못합니다.

어느 해고 강사는 "더 이상 강의를 하고 싶지 않다", 어느 박사 강사는 "아이가 둘이라 나서지 못한다", 어느 강사는 "2학기 때 3강좌를 하게됐는데 입으로만 학문의 자유와 양심을 말하는 고대가 싫어 강의를 하지 못하겠다고 학과에 말했다. 학과는 학교에 항의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달려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고파스 koreapas.net(2009. 8. 23)에 해고된 강사의 아내가 아래와 같은 절박한 글을 올렸습니다.

 


"다음은 제가 고려대학교 홈페이지 온라인민원 사이버감사실에 지난 7월 10일에 올린 글입니다.

답변이 없어 자유게시판에 올렸었는데 오래전 글이 되었는지 없어져서 이곳에 다시 올려봅니다.

사이버감사실은 왜 있는지, 이렇게 무응답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곳이라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덜 부끄러울 듯합니다...저는 귀교에 시간강사를 나가는 사람의 처입니다.

며칠 전에 남편은 학과교수로부터 4학기 이상 강의를 했으므로 2학기에 해촉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학과교수는 비정규직법과 관련해 대학본부 측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납득이 안 되는 점은 남편은 이미 1학기 말에 2학기 강의 위촉을 받았고, 강의계획서를 올려 학생들의 수강신청까지 받은 상태이며, 비정규직법에 해당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문사학이며, 민족의 대학이라는 고려대학교마저도 이러한 무리와 무례를 범한다는 사실에 분노와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제 진정으로 교육을 생각하는 스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구나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 나라의 대학에서 적지 않은 부분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간강사들을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계층으로 만드는 곳이 바로 대학 자체라는 사실에 환멸과 모멸감이 더해집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권위의 허상을 버리시고 각성과 해명을 바랍니다.

남편은 비록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었음에도 학생들이자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지고 있던 모든 의욕을 잃어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여 그의 아내로서 불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쓰고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듭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선택한 학습권마저 무시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 그저 받아들여야할지 저 역시 교우인지라 고대인들의 생각을 청해봅니다."

 

8월 21일 오전 10시 안암 본관 앞에서 연 고대 총학 주최 <우리 선생님들을 돌려주세요!> 라는 기자회견에는 정태호 안암 총학회장, 이세라 세종 총학 부회장, 정경대 대표, 문과대 대표, 김동애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본 본부장, 송환웅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부위원장, 도천수 고려대 민주동우회 회장, 박정훈 대학생(부산대) 사람연대 대표, 김재의 서울대 대학생사람연대 대표, 외대학생, 김영곤 비정규교수노조 고대분회장&nbsp; 등 4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MBC SBS YTN 서울신문 한국대학신문 고대신문 배루시아 인터넷 기자&nbsp;등의 기자가 참석했고 YTN이 보도했습니다.

김영곤 분회장은 "비정규보호법 강사의 질 향상의 어느 면에서도 강사 해고의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송환웅 부위원장은 "대학입시를 넘어 대학 교육의 질, 대학 강의의 질을 높이려면 강사 해고를 철회하고 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nbsp;도천수 회장은 "고대는 해고 강사를 복직시키고 이기수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은 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에 동참하라"고 했습니다. 정태호 회장은 "우리 선생님들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이세라 부회장은 "우리 선생님의 해고는 부당하며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결의문을 나누어 읽었습니다.


2009. 8. 20. 08:07

고대강사 집단해고 정경대성명발표 대학원 불안 커져

8월 19일. 일인시위 하기는 더운 날이다.
오전 11시 조금 넘어 텐트(농성 713일째)를 나서 고대로 향했다. 

학생회관으로 들어가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분향소를 보았다. 어제밤 총학생회장이 설치한 분향소이다. 내가 강사의 해고철회와 학생의 학습권 보장 문제에 골똘하느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와 연관시켜 생각하지 못했다.

판넬과 선전물을 챙겨 중앙도서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정경대쪽 후문으로 가서 선전물을 나누어주었다.
더 많은 학생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정경대 후문 쪽은 사람이 많이 다닌다.

정경대 후문에 도착해보니 호안정대(정경대) 학생회가 낸 성명서가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큰 줄만 적어본다.


<<8월 19일 정경대쪽 후문에 내 건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의 성명서.
고려대학교 당국에게 강사 88명 집단해고를 철회하고 고등교육법 개정에 동참하기를 요구합니다.

'죽은 시간강사의 사회'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죽음으로 비화되는 순간.
09년 8월 고려대 강사 '대학살'의 초읽기- 4학기 연속 강의한 비-박사 강사 88명 내쫓기.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의 시급성- 비정규직 교수 양산은 강사들의 '인권' 침해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

강사 88명 해고 명단을 공개하고 즉각 철회하라!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에 동참하라!

제42대 민족고대 호안정대 학생회>>


지나는 학생과 어른들에게 선전물을 나누어주었다. 선전물을 받으며 목례를 하거나 수고한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받는다. 전임교수로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받는다. 전에 대체로 필요 없다는 태도와 다르다. 그러나 교수와 학생이 같이 갈 경우는 받지 않는다.

12시 40분 쯤 정경대 학생 7명이 왔다. 선전물을 나누어주고 또 "비정규 강사 88명을 해고했습니다. 우리의 강사 선생님의 해고는 학습권 침해입니다. 고등교육법을 개정해 강사에게 교원지위를 회복하는데 고대 총장은 동참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

학내 성원들이 많이 알게된 것 같다. 건물안에 선전물을 붙여놓기고 하고 소자보도 보인다고 한다.
세종캠퍼스 자유게시판의 읽은 수가 많다. 많게는 600단위를 넘는다. 안암에 비해 정보가 적은 탓일 것이다. 세종캠퍼스에서 선전물을 나누어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다.

1시 5분경 일인시위를 마치고 총학생회로 가던 중 언론관 앞에서 세종캠퍼스에서 나에게 강의를 들은 학생을 만났다. 강사 해고 관련 사항을 두고 대화했다. 지나던 학생들이 세워둔 판넬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일을 모두 마치고 학생회관 2층의 학생식당에 들어가서 냉면을 먹었다. 1700원이다. 양은 많은데...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께 분향했다. 재임중에 강사의 교원지위 회복 공약을 지켰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쓸 수 없어 방명록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말에 이 공약을 챙겼지만 결국 학진 프로젝트에 강사 참여를 늘리는데 그쳤다.

전철역으로 가기 앞서 대학원 방향으로 갔다. 벤치에서 대화 중이던 한 강사 선생님이 말한다. 자신은 학생일 때는 시위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참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둘이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강사 해고 철회 활동에 같이 못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반 대학원 학생회실을 안내한다.

대학원 학생회실에 들어가니 반갑게 맞이한다. 커피를 끓여 준다. 대학원 학생들 사이에서 강사 집단해고 사태가 화제라고 한다. 강사 집단해고는 강사 교권의 문제이다. 박사과정에 있으며 강의하는 경우는 4학기 제한에 걸리고, 박사 강사는 교원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신분이 더 불안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강의는 전임교수 위주로 더욱 보수화할 것이다. 대학원 진학 희망자는 줄어들 것이다. 대학원장이나 대학원교수(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들이 이 문제를 느끼는 강도가 어느 정도일까 의문이다.

학생들이 학습권을 인식하는 정도보다 대학원 학생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안감은 더 컸다.

전국적으로 해고 강사가 5천-1만명으로 예상하는데, 학문 대학원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클 것이다.

오후 3시 일을 모두 마치고 고대 전철역/여의도 국회 앞 텐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