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1. 20:34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오늘, 대학을 말한다-10]






2009년 07월 21일 (화) 09:18:49 류승완 .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 촉구 국회앞 텐트농성 684일째!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http://stip.tistory.com

대학생의 공간-비정규직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84225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이 땅의 대학원생은 참 학문의 열정을 포기해야 살 수 있는가?(사진/이광수)

 










입시로또의 꿈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따님이 이번에 ㅅ대학에 들어갔다면서요.” 몇 년 전에는 이런 인사가 흔했다.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형편이 펴지고, 부모의 체면이 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집안의 형편이 펴진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이번에 검사가 되셨다면서요.” 이 정도는 되어야 편하게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는 우리의 가족문화에서 혈육에 대한 육친의 기대와 헌신은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애틋하다. 자식 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부모의 심정은 해마다 신문에 실리는 ‘수능시험장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신문에는 해마다 꼭 같은 기사가 실린다. “학교수업 만으로 전국수석” 그 옆에 “역경을 딛고 명문대 합격”이란 기사가 양념으로 붙어 있는 것도 해마다, 신문 마다 같다.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모든 학부모들이 입시경쟁에서 내 아들 딸만은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를 가진다. 나아가 입시경쟁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의 미래를 보장해주리라는 꿈을 가진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서너 살 때부터 꼬박 15년을 어른도 견디기 힘든 입시경쟁 속으로 기꺼이 밀어 넣고 있다. 이 경쟁은 승리한 1%에게 평생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입시로또이기 때문이다.

로또는 2천원을 걸지만 입시로또는 평생을 건다. 아주 힘들어서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기도하는 어머니’와 ‘학교공부에만 충실한 전국수석’과 ‘역경을 이겨낸 합격생’ 옆에는, ‘대입시험 비관자살’의 悲報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다. 아마도 지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공부를 못해서’ 죽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입시로또의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지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죽어야 하는 괴로움마저도 이겨내는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이 꿈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과 계층재생산의 꿈이다. 없는 자는 자식을 가르쳐서 없는 한(恨)을 풀려고, 가진 자는 기득권을 물려주려고 ‘간판’과 ‘자격증’이라는 꿈의 대열에 개미처럼 줄서는 것이다. 도대체 이 꿈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근대화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근대적 교육제도이다. 그리고 근대적 교육제도란 다름 아닌 1백년 전 일제(日帝)가 우리에게 강제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본질은 ‘절대다수의 희생과 소수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물론 특권을 누리는 소수는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인들과 그에 협력한 한줌 친일반역자들이었고, 희생당하는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이제 해방과 분단이 60년을 지났건만 이 꿈은 ‘사교육’ 이라는 현실과 절묘하게 얽혀있다. 서로 안 맞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맞아서 갈등이다. 꿈은 한풀이와 기득권대물림의 절묘한 조화이다. 현실은 식민지 교육제도와 상업주의의 절묘한 조화이다.

‘2007년 현재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국내총생산(GDP)의 6.4%, 55조원 규모로 농어업보다 2.2배가 크고, 부동산·건설업 등과 맞먹는다. 전체 건설업 종사자가 180만명인데, 사교육종사자 160만 명이다. 국민전체 지출의 11%로 가계비에 가장 큰 부담인데 불황에도 유일하게 높아진다. 소비지출의 9.4%로 추정되는 교육비는 OECD 국가들 중 수위를 다투고 있다. 이에 비해 정부지출은 43.4%에 불과하고 공교육비 정부분담률은 59.7%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이다. 결국 공적인 교육산업을 사적 영리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교육산업의 신자유주의화이다(김일영, 2009, <한국교육산업의 현주소>, 새사연).’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어린쥐’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팔 걷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입시로또가 조선의 농민에게 대과 급제처럼, 일제하의 농민에게 대학교처럼, 누군가는 해당되지만 절대다수 ‘돈 없는’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입시로또의 꿈은 ‘식민주의 공교육’과 ‘상업주의 사교육’이라는 현실과 칡덩쿨처럼 얽혀서 아이들을 기약 없는 ‘입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 치달음의 끝은 어디인가?

입시로또라는 경쟁은 누구에게도 성공을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불행과 극소수의 행복’ 만은 확실히 보장한다. 그런데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근대의 기본공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가치는 우리 생각을 규정하는 절대선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교육제도와 현대적 교육시스템이 이 기본가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 논리상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도 그대로 모순으로 나타난다. ‘기도하는 어머니’, ‘과외안하는 전국수석’, ‘역경을 이긴 학생’이 한결같이 달려간 ‘어린쥐’ 교육의 끝, 한국의 대학에는 또 다른 어린 쥐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다.

전문대 위에 4년제, 지방사립대 위에 지방국립대, 지방대 위에 수도권대, 수도권대는 명문대와 비명문대, 명문대는 비인기학과와 인기학과, 인기학과는 국내학위와 외국학위, 외국학위는 또 출신대학별로 줄을 서야 한다. 이 뿐이 아니다. 본격적인 줄서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학 사회는 돈을 내는 집단인 학생과 돈을 버는 집단인 재단과 교수로 나누어져 있다. 학생은 학부생, 석사과정, 박사과정, 박사 후 과정으로 구별된다. 교수는 조교, 직원, 시간강사, 겸임교수, 대우교수, 연구교수/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나누어진다. 다시 (정)교수는 학과장, 학장, 보직교수, 부총장, 총장으로 나뉘고, 그 뒤에는 사학재단과 교육관료로 연결된 먹이사슬이 있다.

그리고 교육산업을 지배하는 사교육 카르텔이 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 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오늘도 교육로또를 꿈꾸는 절대다수의 ‘대리만족형’ 서민들이 허리를 휘어가며 아이들을 숨막히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로또 추첨의 결과는 언제나 ‘기득권 세습형’의 승리, 극소수를 위한 절대다수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극소수와 절대다수의 사이에 ‘역경극복형’이 있지만, 언론의 과대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자살형’과 마찬가지로 꼴찌당첨자일 뿐이다.

대학원생의 꿈

그러면 도대체 입시경쟁의 종착점이라는「지금」,「여기」의 대학의 실상은 어떤가? 이러한 현실에서 대학원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이런 질문은 막대한 등록금을 바쳐가면서 내 자녀와 제자의 인생을 믿고 맡기는 ‘대학’에 대해서 학부모나 선생님들도 같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대학의 본령은 학문연구를 통한 교육과 지식의 생산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원생들은 대학의 중추, 나아가 사회의 미래라 할 만하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쳐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확률은 그야말로 로또당첨에 버금가는 확률일 것이다. 10만 명을 훨씬 넘는 한국의 비정규교수(시간강사)와 대학원생들이 이 어려운 관문을 거치는 이유는 대부분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진실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어려운 관문을 뚫은 사람들이 교수임용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오늘날 한국대학의 현실이다. 그런데 진실과 합리를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이 이 현실에 침묵한다. 왜 그런가? 바로 여기에 어린 쥐의 행렬, 교육로또의 먹이사슬의 비밀이 숨어있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고리는 바로 ‘비정규교수’에 대한 합법적 제도적 차별이다. 비정규 교수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비정규교수와 정규교수(전임강사 이상)는 임금(동일노동에 10배 이상 격차), 고용, 신분, 처우, 복지 등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직원은 교원이지만 시간강사는 교원이 아니며 그렇다고 노동법이 보장하는 근로자도 아닌 실종된 존재이다. 그의 인권과 노동권은 사회적 평균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어떤 대학원생도 ‘눈물의 골짜기’를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학문적 진리보다는 눈치보고 줄서는 어린 쥐의 대열에 끼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학위를 받는 과정 자체가 일제 식민지 교육의 봉건적 요소를 철저하게 유지해놓고 있다. 제도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원천적으로 가로막힌다. 합리적인 연구자는 꿈을 거세당하고, 비판적인 연구자는 존재자체를 부정 당한다.

이 모든 문제가 교원관련 법조항에 원래 있던 ‘강사’ 한 단어를 복원하면 해결되는데도 10만 명이 넘는 대학원생들이 침묵하고 있다.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 우리 대학원생은 생활을 위해 꿈을 접고, 살기위해 비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상의 모든 나라 가운데, 대학원생, 연구자가 ‘참다운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에 죽어야 하고, 그것을 포기해야만 살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이러한 현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버려야만 살 수 있는 대학원생의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글 류승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수료)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2009. 7. 20. 21:02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오늘, 대학을 말한다-9]
2009년 07월 16일 (목) 18:52:53 박정훈 대학생사람연대 대표, 부산대학생

   
▲지금 대학생의 공부는 높은 몸값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사진/이광수)

2008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안검사를 만난 적이 있다. 지난 해 촛불이 한창 타올랐던 6월 10일 부산 서면 로타리를 점거를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검사실에 들어가 꾸벅 인사를 했지만, 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명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서 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했지만 범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검찰은 이 모든 것이 철거민 탓이라고 이야기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구속했다. 경찰은 무혐의였으며, 조직폭력배 4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계속해서 ‘법치’를 강조하고 있는 요즘, 사법부에 속한 사람들은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들을 해본 적이 있을까? 한쪽에서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이 위헌이라고 생각한 판사가 위헌제청을 하고 판사직을 그만두기도 했다. 그런데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관이라는 사람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판결을 내라고 이야기한다. 법에 대해 철학이 없는 사람이, 사법부의 최고수장이 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과대학을 로스쿨로 전환해서, 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 다양한 과에서 학부공부를 마친 대학생들이 로스쿨에 진학하여 토론이 이루어지고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학부는 로스쿨을 가기위한 통로로 변질됐다.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한 이후, 생명공학부 등에 대거 몰려 커트라인이 올라간 사례도 있었다. 한편, 로스쿨 합격생의 3분의 2가 서울 수도권 대학 출신이었다. SKY대학이 각각 288명, 161명, 140명의 합격자를 냈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와 몸값을 올리기 위한 과정인 구조 속에서 로스쿨만 덜컥 도입한다고 해 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로스쿨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범대에 가보면, 진정으로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진학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전문대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사법부와, 인간을 가르치는 교육,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안정적인 일자리로 바뀌어 있었다. 흔히들, 이러한 문제를 요즘 20대들의 도덕적 결함, 이타심의 부족 등으로 꼽는 데, 이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이태백이 풍류를 즐길 없는 ..

이것의 진정한 원인은 20대들의 불안한 미래, 즉 불안정한 노동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20대들이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이 백수)의 이름을 가지고도 제대로 풍유조차 즐길 수 없다. 값싸고 언제든지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를 착취하여 성장해온 한국사회가 20대들과 대학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예술가를 꿈꾸는 10대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그림을 엄청난 사교육을 들여 배우고 그린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잘 팔리는 그림, 상품가치가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이에 따라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높은 몸값을 받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대학은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1년에 1000만원을 받고 대학 졸업장을 판다. 비정규직 교수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모습을 현상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학운영을 기업으로 생각하고, 교육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철학의 빈곤’과 이것을 옹호하는 사회구조의 ‘빈곤한 철학’이 문제이다. 비정규직교수의 과거와 20대 청년들의 미래라는 시간의 대칭이 대학 교양수업 강의실에서 겹쳐지고 있다.

이 문제는 대학교육과 산업구조, 노동시장에 대한 거대한 변형이 있어야 해결가능하다. 21C의 새로운 가치는 지금까지 가치로 인정받지 못했던, 보육과 육아 장애인 활동보조인 등과 같은 돌봄 노동과 사회적 노동에서 나올 수 있다. 이미 한계에 부딪힌 자연에 대한 수탈에서 벗어난 생태적 발전 역시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이다. 그리고 지식, 문화, IT사업에 기반을 둔 고부가가치 사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고숙련노동과 이것을 위한 평생교육시스템, 그리고 창의적 노동을 위한 생활의 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제로 고졸에 독일어밖에 할 줄 모르는 스위스의 노동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를 만드는 고숙련 시계공이 되어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수 천 만원을 들여 대학을 나온 한국의 대학생들은 청년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삶이 보장돼야 학문의 자유도..

유럽에서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충분한 휴식과 사유의 시간 이후에 창의적 노동이 가능하며, 생존의 위협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OECD 국가 가운데 세계 1위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21C형 산업사회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현재 OECD 평균인 20%에 훨씬 못 미치는 5% 정도의 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망의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가질 수 있다.

최근 이것의 유력한 정책적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2010년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현재 소액의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좌․우를 막론하고 정책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라는 각국의 기본소득 관련 단체들의 연대체도 존재한다.

이렇게 인간의 삶이 보장되어야 만이 대학에서의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으며, 대학생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자신의 철학과 무관한 법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 어릴 때부터 단편영화들을 촬영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이 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학문을 하고 싶은 이들은 인문학과 기초과학과 같이 소위 ‘배고픈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공부 할 수 있다. 20대의 청년들이 대학을 가는 이유가 생존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마음껏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는 20대의 미래이길 기대해본다.

글 박정훈(대학생사람연대 대표, 부산대학생)
사진 이광수(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2009. 7. 14. 17:22

대졸자의 직장생활/박성찰

대졸자의 직장생활
[오늘, 대학을 말한다-8]
2009년 07월 12일 (일) 12:53:10 박성찰 영남대 졸업생

   
▲ 지금 대학생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가? (사진/이광수)

따르릉∼ “감사합니다. 박성찰 입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가장 듣기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함이 공존하는 말이다. 입사 1년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때로는 실수를 연발해 상사들을 당혹케 했고 때로는 좋은 성과를 내어 ‘박성찰’ 이라는 이름 석자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가족처럼 따뜻하지만 이면에는 얼음장같은 냉정함이 있는 곳, 바로 직장. 지금부터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느낀 “직장”이라는 곳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우수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졸업을 앞두고 있다면 누구나 느낄 법한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내가 다니고 있던 영남대 강의실과 도서관,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 담배를 태우던 휴게실에서도 단연 가십거리 중 으뜸이었다. 누구는 어디에 취업을 했고, 누구는 어디에 지원을 했다가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신선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만큼, 취업에 대한 불안함은 졸업예정자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였다.

마지막 학기였던 2008년 상반기에 나 역시 많은 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귀하는 우수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었고, 마지막 이라는 생각으로 원서를 낸 L그룹의 한 계열사에 다행스럽게 입사를 할 수 있었다.

그룹연수를 마치고 계열사 연수를 거쳐 지금 내가 속한 부서에 발령을 받기까지는 힘든 취업문을 통과한 나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대기업에서 근무한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교제를 해오던 여자 친구와 입사 후 결혼도 약속했고, 휴일에 학교에 가면 후배들이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엄/친/아(엄마친구아들)였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스트레스, 상사에 대한 불만 등 나열하기 힘든 무수히 많은 것들이 암초처럼 숨어 있었다. 입사1년의 범위 내에서 퇴사율과 이직률이 높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던 시기였다.

내가 아닌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는 느낌, 이러한 생각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 생활이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라는 궁금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이러한 매너리즘이 최고점에 달할 무렵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말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힘든 시기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과정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그러한 경험일 수도 있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부분은 적어도 “내가 충분히 가고 싶었던, 그리고 희망했던 회사”라는 전제조건이 선행할 때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돈을 많이 줘서, 흔히 말하는 짤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본 대학-취업-직장이라는 과정은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기업에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취업만 하면 일단은 백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이유,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일단은 입사를 결정한다. 때문에 입사의 출발은 처음부터 불안감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전공을 살려서 취업한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예전에는 아니었는가? 라는 반문도 생겨날 수 있지만 예전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학교 후배들에게 넌 어디에 취업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금융권이요” “대기업이요” “공기업이요” 라는 말 뿐이다. 이유는 돈을 많이 줘서, 흔히 말하는 짤리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

이것이 바로 현재 청년 실업의 현실이다. 맹목적인 선호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었고 지금 현재에도 자신이 정말 가고 싶은 기업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 의견이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입사 1년차의 눈으로 그동안의 직장생활을 돌이켜 볼 때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의 구직활동은 자신에게 있어 자칫 평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교육기관으로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자아를 개발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교육기관으로 대학이 사람들에게 각인된다면 결국 그 피해는 그곳을 거쳐 가는 학생들이 입게 될 것이다.

취업률 조사를 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까지 취업자로 둔갑하고 때문에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이 취업률1위라는 현수막을 당당하게 내걸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글을 올리는 나 역시도 이러한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해법은 바로 “대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창문 밖을 보니 맞은 편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를 태우고 끄다만 불씨 때문에 타는 냄새가 나 누가 신고를 했는가보다. 그 층에 입주한 사람들은 다들 나와서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하는 듯한데, 그 위쪽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방차가 온 줄도 모르는지 저마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TV시청을 하고, 빨래를 걷고 있다. 밑에서는 난리가 났는데도 말이다. 불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아니면 무관심 한 것일까?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지금의 대학문제가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나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고 내 자식들이 안고가야 할 문제일 수도 있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대학이라는 공간이 변화되고, 그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취업보다는 다른 부분 때문에 고민도 해보고 그 고민 속에서 자신이 발전되는 그러한 날이 오길 대졸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박성찰(영남대 졸업생)


2009. 7. 14. 17:16

대학생과 군대/김성환

대학생과 군대
[오늘, 대학을 말한다-7] 지금은 변화를 꾀해야 할 시기!
2009년 07월 08일 (수) 09:59:36 김성환 고려대학교 세종배움터 민중민주 정치경제학연구회

   
▲사진/이광수

"대학생과 군대...나는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지만..."을 말하려면 우선 대학생의 현 상황을 알아야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대학이라면 지식의 상아탑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현재의 대학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정교수에게는 안정적인 고수익의 직장이자, 권력의 장이다. 대학생들에게는 그저 대학이 배워가는 ‘지성인들의 배움의 장’이 아닌 단순히 좋은 직장으로 가기위한 좋은 대학명함 만들기에 급급한 곳이다. 대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지금 대학은 대학생들에게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으로 밖에 자리매김을 못한 것 같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주요과목의 배움터이다. ‘아! 그렇다면 대학은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학생들은 어떠한 것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인가?’ 대학은 단순히 전공 공부만 하는 그런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사회에 나가기 이전에 준사회인이 된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전공 공부,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한 자격증 따기 등을 한다. 혹은 고등학교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취해서 게임이나 술에만 취해있지는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은 지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무난해 보이는 대학생활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모두가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신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진정한 교류는 적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고민들이 없다. 사회의 문제점을 바꿔나가려고 하기보다는 그에 순응하는 것을 배운다. 대학생은 나만이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대학생의 생활에서 군대의 영향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학생에게, 특히 남학생들의 주요 고민인 군대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군대라는 것에 대해 ‘남자는 가는데, 여자는 안 가네’, ‘다른 나라는 모병제인데 우리나라는 징병제네’와 같은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위에서 말한 대학생이 진정으로 알고 느껴야 하는 대학과 대학생 시기 군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학생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는 큰 요인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다.

군대 갔다 오더니 철 들었네

그렇기에 대학생과 군대를 관련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우선 군대는 계급사회이다. 계급이 다인 것이다. 군대를 마치고 오면 흔히 그런 얘기를 한다. “군대 갔다 오더니 철들었네”라고.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군대에서 사회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고 나왔다는 말이다.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상급자에게 잘못됐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며 시키는 데로만 하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군대라는 계급사회에 필요한 생각들만 일방적으로 주입시킨다. 우리가 스스로 사고를 해서 판단을 할 생각의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제대를 한 대학생은 뒤에 대학사회의 흐름에 적응을 하기 힘들다.

대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4년제가 되었든 2년제가 되었든 거의 모든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 대학생활에 적응할만 하면 가야하는 곳이다. 그리고 제대하고 나와서도 대학생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뿐더러 무엇보다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심하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

그렇다! 대학생과 군대의 공통점이라면 ‘누구나 간다.’라는 인식이 아닐까? 더욱이 젊음을 보내는 곳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가야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대학교에서도 큰 꿈을 펼치는 경우도, 군대에서도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을 겪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뉴스나 신문, 인터넷에서 듣는 그런 일들이다. 실상 주위에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가 많지 않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답을 풀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려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내 집 마련, 좋은 직장 들어가기, 노후 대책 세우기 등이다. 생각해보면 이것들은 전부 돈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명문고, 명문대를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돈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자.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한 가정이 내 집 마련의 꿈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후에 대한 복지도 잘 돼 있기 때문에 기를 쓰고 돈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은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사회의 중심, 대학생

나는 무엇이든 사회를 굴릴 수 있는 원동력의 중심에는 대학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젊음의 힘! 가장 머리가 잘 굴러갈 때이기 때문에, 패기가 넘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가장 먼저 나서서 얘기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촛불집회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을 것이다. 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촛불집회를 국민들끼리 그리고 국민과 국가가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름의 방식대로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사람을 나는 ‘지성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대학생이 되어야한다. 가만히 않아서 사회의 문제점들은 생각하지도 않거나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으로서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학생의 타이틀이 아깝다. 적어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대학생에게 또하나의 군대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집회 등에든 막아서는 사람인 의경이다. 이들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부당하게 잡혀간 사람들이 많다. 민간인을 폭력으로 대하는 의경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후유증도 나타난다. 이들도 대학교를 다니던 20대의 대학생과 같은 또래이다. 그들도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화를 내야하는 것은 의경이 아니다. 바로 그 위의 관료들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서 사회의 문제점이 있다면 말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우리 대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장서서 우리 모두를 위한 많은 고민과 행동을 보여줬으면 한다. 그러려면 대학생들이 군대의 명령식 주입식 사고의 영향을 덜 받아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글 김성환(고려대학교 세종배움터 민중민주 정치경제학연구회)
사진 이광수(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2009. 7. 5. 21:27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오늘, 대학을 말한다-6]
2009년 07월 02일 (목) 14:38:36 조한일 .

   
▲대학이 취업 전쟁을 준비하는 곳인가? (사진/이광수)


대학생의 취업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내용은 현재의 취업, 일자리 나누기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가 주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듣기 좋은 내용과 희망적인 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의 대학생들이 가장 크게 당면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을 대표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라 생각이 들어 주변의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2009년 20대는 심장이 없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플 것 같아서, 슬프다고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웃지’ 2009년 봄날을 강타했던 유행가의 가사다. 2009년의 20대의 모습,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고, 이번에는 혹시나 하며 웃어보지만, 자신은 아니라곤 하지만, 결국 체념하고 다시 웃기를 반복하는, 마치 우리 대학생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올해 초부터 등록금과 청년실업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대학생들의 언론보도가 빈번해졌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2004년에 대학에 들어와 4학년이 되어버린 나는 심심찮게 주변의 소식을 듣는다. 같이 대학에 들어왔던 여자동기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 친구는 하루에 3-4개의 입사원서를 쓴다고 한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던 그 친구의 취업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회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취업의 전쟁터이다. 정부에서는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허울만 좋은 인턴과 일용직밖에 없다. ‘이거라도 없으면 안 된다.’, ‘눈을 낮춰서 나가라’ 라는 등 동의할 수 없는 말만 쏟아 내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배움을 실현하고 나아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게 곧 노동이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만 해결책을 찾는데서, 현재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사람들은 항상 과거에서 후회하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꿈꾸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로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애석하게도 꿈꾸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만으로 현재를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우리는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가 듣게 되면 참으로 바보같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는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도전이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돈이 되는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더 더욱 공부를 하게 된 후, 기업가 정신을 알게 되었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 그것이 내가 해야한다 것도 알았다. 배움을 통해 꿈을 꾸고 단지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만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대학은 아닐까?

혼자서는 너무나도 힘들기에 선생님들이 있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여 마침내는 이루어내는 일련의 방법을 학교에서는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학교에서는 낙오자라 손가락질 한다. 이런 한가지 한가지들이 모여서 역동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할 지성의 상아탑을 종속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렇게 수동적이고 형편없는 인간이 된 우리를 만든 주체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생이 바라보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과연 대학이란 곳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대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고, 어떤 배경에서 지금의 대학이 성립하게 되었을까? 학문의 자유와 교수들을 위해 자유로이 길드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과 달리 이 땅에서의 대학은 학문적 관심과 달리 정치적 관심에서 설립 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2008년의 우리 사회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촛불’ 이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촛불을 들었던 사람이 없다. 언젠가부터 내가 촛불을 얘기하면 속 편한 자식의 투정으로 받아들인다. 열심히 논쟁을 벌이면 결국 사람들은 ‘취직이 어려우니 토익을 보고 학점 관리하다보면 그런 것은 신경 쓸 틀이 없다.’ 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대학생들은 개인의 문제만 생각하지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만 잘한다면 잘 살 수 있고, 이 사회의 주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인건 알지만 나는 아닐 것이다. 이게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통념이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것까진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 막연하게 한 역할을 해낼 거라고 본다. 그래서 초, 중, 고 과정에서 우리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많은 부모님들은 대학에 자신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맡긴다. 그것도 무한한 신뢰로써 대학에 위임한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하루 종일 마케팅 분석기법의 이름을 외우고, 토익 영어단어를 외우고 문제 푸는 법을 배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 뛰어난 마케팅 기법을 개발하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로이 소통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단지 외우기만 한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혼자여서 약한 것이다!

내가 어릴 적 하늘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하늘과 나의 공간을 메울 만큼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하늘은 성큼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너무나도 동경하던 하늘이었지만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커버린 만큼 꿈도 작아졌었다. 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오고 난 하늘을 날 수 있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금 더 하늘에 가까워졌지만 날 수 있는 힘도 있지만,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내가 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날지 못하는 닭일 뿐이란다. 그래서 예전이 그립다. 닭이 될 줄 몰랐던 작았던 그때로, 그때에는 적어도 아주 커다란 꿈과 희망이 있었다. 나와 하늘 사이를 가득 메웠던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후회와 그리움을 추억할 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혼자서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싸워서 이기는 법만 지속적으로 배워간다. 교실이 새롭게 변해야 한다. 이제는 공존하여 상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학 속의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제대로 된 문제 인식과 해결을 공유하는 것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조한일(고려대생)

2009. 7. 3. 20:29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조한일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오늘, 대학을 말한다-6]
2009년 07월 02일 (목) 14:38:36 조한일 .

   
▲대학이 취업 전쟁을 준비하는 곳인가? (사진/이광수)


대학생의 취업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내용은 현재의 취업, 일자리 나누기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가 주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듣기 좋은 내용과 희망적인 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의 대학생들이 가장 크게 당면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을 대표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라 생각이 들어 주변의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2009년 20대는 심장이 없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플 것 같아서, 슬프다고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웃지’ 2009년 봄날을 강타했던 유행가의 가사다. 2009년의 20대의 모습,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고, 이번에는 혹시나 하며 웃어보지만, 자신은 아니라곤 하지만, 결국 체념하고 다시 웃기를 반복하는, 마치 우리 대학생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올해 초부터 등록금과 청년실업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대학생들의 언론보도가 빈번해졌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2004년에 대학에 들어와 4학년이 되어버린 나는 심심찮게 주변의 소식을 듣는다. 같이 대학에 들어왔던 여자동기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 친구는 하루에 3-4개의 입사원서를 쓴다고 한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던 그 친구의 취업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회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취업의 전쟁터이다. 정부에서는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허울만 좋은 인턴과 일용직밖에 없다. ‘이거라도 없으면 안 된다.’, ‘눈을 낮춰서 나가라’ 라는 등 동의할 수 없는 말만 쏟아 내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배움을 실현하고 나아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게 곧 노동이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만 해결책을 찾는데서, 현재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사람들은 항상 과거에서 후회하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꿈꾸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로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애석하게도 꿈꾸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만으로 현재를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우리는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가 듣게 되면 참으로 바보같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는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도전이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돈이 되는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더 더욱 공부를 하게 된 후, 기업가 정신을 알게 되었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 그것이 내가 해야한다 것도 알았다. 배움을 통해 꿈을 꾸고 단지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만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대학은 아닐까?

혼자서는 너무나도 힘들기에 선생님들이 있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여 마침내는 이루어내는 일련의 방법을 학교에서는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학교에서는 낙오자라 손가락질 한다. 이런 한가지 한가지들이 모여서 역동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할 지성의 상아탑을 종속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렇게 수동적이고 형편없는 인간이 된 우리를 만든 주체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생이 바라보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과연 대학이란 곳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대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고, 어떤 배경에서 지금의 대학이 성립하게 되었을까? 학문의 자유와 교수들을 위해 자유로이 길드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과 달리 이 땅에서의 대학은 학문적 관심과 달리 정치적 관심에서 설립 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2008년의 우리 사회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촛불’ 이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촛불을 들었던 사람이 없다. 언젠가부터 내가 촛불을 얘기하면 속 편한 자식의 투정으로 받아들인다. 열심히 논쟁을 벌이면 결국 사람들은 ‘취직이 어려우니 토익을 보고 학점 관리하다보면 그런 것은 신경 쓸 틀이 없다.’ 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대학생들은 개인의 문제만 생각하지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만 잘한다면 잘 살 수 있고, 이 사회의 주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인건 알지만 나는 아닐 것이다. 이게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통념이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것까진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 막연하게 한 역할을 해낼 거라고 본다. 그래서 초, 중, 고 과정에서 우리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많은 부모님들은 대학에 자신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맡긴다. 그것도 무한한 신뢰로써 대학에 위임한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하루 종일 마케팅 분석기법의 이름을 외우고, 토익 영어단어를 외우고 문제 푸는 법을 배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 뛰어난 마케팅 기법을 개발하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로이 소통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단지 외우기만 한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혼자여서 약한 것이다!

내가 어릴 적 하늘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하늘과 나의 공간을 메울 만큼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하늘은 성큼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너무나도 동경하던 하늘이었지만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커버린 만큼 꿈도 작아졌었다. 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오고 난 하늘을 날 수 있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금 더 하늘에 가까워졌지만 날 수 있는 힘도 있지만,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내가 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날지 못하는 닭일 뿐이란다. 그래서 예전이 그립다. 닭이 될 줄 몰랐던 작았던 그때로, 그때에는 적어도 아주 커다란 꿈과 희망이 있었다. 나와 하늘 사이를 가득 메웠던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후회와 그리움을 추억할 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혼자서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싸워서 이기는 법만 지속적으로 배워간다. 교실이 새롭게 변해야 한다. 이제는 공존하여 상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학 속의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제대로 된 문제 인식과 해결을 공유하는 것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조한일(고려대생)


2009. 6. 29. 18:05

대학생과 대학생협의 역할/경희대 김한울

대학생활협동조합의 역할
2009년 06월 29일 (월) 02:56:45 김한울 경희대학교생활협동조합 학생위원회 위원장

   
▲ 대학이 상업화로부터 자유로워야(사진/이광수)

시장으로 나간 대학 환경

대학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고경영자(CEO)형 총장이 무수하게 나타났으며, 이제 대학 내에는 쇼핑몰이나 백화점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대학은 이제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것처럼 변모해가고, 결국 대학의 존재가치는 얼마나 경쟁사회에서 더욱 앞서갈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드러났다. 이른바 수월성을 지향하며 대학은 시장과 함께 나아가려하고, 대학은 더욱 성장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소외된 개인과 왜곡된 사회, 상업적 생산성을 대학의 가치로 삼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루이스(Harry R. Lewis) 교수는 저서 <Excellence Without a Soul>(영혼 없는 수월성)에서 하버드대학이 추구해 온 수월성이라는 가치가 결국 구성원에 대한 참된 배려를 외면하고, 경쟁지상주의로 흐른다고 지적했고, 또한 하버드대학도 경쟁을 지향하는 사회의 편협성을 넘어서 인간과 지구, 공동체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돕도록 교과과정을 대폭 수정한 바 있다.

한국 또는 일본의 대학생활협동조합(이하 대학생협)은 변화하는 대학 안에서 일관되게 그 구성원에 대한 복리후생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협은 한편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지적된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적확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2009년 초 현재, 한국에서는 22개 대학에서 생활협동조합이 구성되어 있다. 4년제 대학 200여 개 가운데 겨우 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22개의 대학생협은 각자의 영역에서 학생과 교수, 직원이라는 3자의 복지를 담당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협동을 통한 공동체 형성 위한 대학생협

한국에서 대학생협은 학생들의 일상적인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80년대를 전후하여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위해 활동하고,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공동체 영역에서 각 개인이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자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를 대학 안에서 함께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던 학생소비자협동조합은 그 영역을 대학 내의 구성원, 학생-교수-직원 3자의 구성원 모두를 위한 대학공동체로 발전되어 왔으며 생협 운동의 한 갈래로서 소비자와 공급자, 그리고 이익을 다시 환원할 때에 그 수혜자가 일치하는 조직이다. 즉 공동생활영역인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후생복지적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대학생협은 후생복지적 측면뿐만 아니라 대학 내의 왜곡된 경제구조를 바로하고, 또한 각 주체간의 동등한 협동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학생들 또는 그 구성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의 상업화를 막고, 그 잉여도 다시 구성원의 복지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대학생협은 대학으로 침투하고자 하는 상업자본에 대한 보루가 될 뿐 아니라, 대학의 시설을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 구성원에 의하여 운영토록 함으로써 경제적 공동체를 실현한다. 이러한 각 주체의 생활은 결국 협동을 통하여 하나의 공동체적 생활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대학 이후에는 일반 사회에서도 작용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또한 대학생협은 소비자인 대학의 구성원을 소비뿐만이 아니라 공급의 주체로 끌어올려 현재의 유통구조를 고민케 하고,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는 역할을 돕는다.

대학생협의 원칙

이러한 대학생협은 기본적으로 학생과 교수, 직원이라는 세 주체에 의하여 구성된다. 그리고 그 운영에 있어서는 협동조합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협동조합의 원칙이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1966년에 제정하고 1995년에 수정한 것으로서,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적 경험에 입각하여 ICA가 세계의 협동조합이 공통으로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정한 것이다. 그 내용을 대학생협의 운영과 함께 살펴보면,

1)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의지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서, 가입과 탈퇴는 자유롭게 보장된다.

2) 협동조합은 자본의 결합체가 아니라 사람, 즉 조합원의 결합체이므로 출자금액에 관계없이 그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이는 경제적인 구조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실현하여, 자본이 아닌 인간의 우선을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대학생협 또한 조합원의 지위나 출자금액에 상관없이 그 조합원 모두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3) 조합원의 공평한 출자와 함께 조합의 재산 또한 민주적으로 관리된다. 또한 잉여금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그 조합의 발전, 각 조합원의 사업 이용에 따른 환원, 조합원이 인정하는 다른 활동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4) 협동조합은 그 구성원에 대하여 교육이나 연수를 통해 조합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학생협도 조합원에 대한 교육이나 실무자, 임원 단위를 대상으로 하는 꾸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5) 협동조합은 지역적·전국적·광역적·국제적인 구조를 통해 서로 협동하여 그 사명을 다한다. 대학생협의 연합체인 대학생협특별위원회(전국생협연합회 산하)는 그 자체가 광역적인 협동을 위한 조직이며, 또한 일본이나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생협과 서로 협동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이러한 원칙 아래 대학생협은 구성원이 대학 내에서 후생복지시설의 운영과 경제생활의 협동을 통해 주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개인의 의식을 성장시켜 생활의 협동을 통한 생활공동체의 구현을 돕고, 구성원이 대학생협의 활동을 통해 주인으로 설 수 있도록 협동조합이나 환경, 생태 등과 관련한 다양한 교육사업 및 홍보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의 상업화와 대학생협의 역할

처음에 살펴본 대학의 변화와 공동체에 대한 성찰 없는 경쟁 속에서, 대학생협은 인간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좋은 방도가 된다. 사회의 변화에 먼저 필요한 것은 그 구성원의 의식의 변화이다. 대학생협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대안과 창조의 질서로서, 새로운 생활공동체의 구현의 중심이 될 것이다.

새로운 생활공동체의 구현은 단순히 학내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형 상업자본과 함께 시작된 시장화, 그리고 대학의 상업화 속에서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대학의 학문적 위상을 좀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상업화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생협 자체가 아니라, 생협과 함께하는 학내 구성원, 즉 공동체가 구현된 조합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생협이 안고있는 과제라고 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2009. 6. 28. 06:24

욕망의 소도시, 지방대학을 지방에서 석방하라/홍상현

http://club.cyworld.com/52842255113/31188579
욕망의 소도시, 지방대학을 지방에서 석방하라
[오늘, 대학을 말한다-4]
2009년 06월 25일 (목) 13:18:28 홍상현 대학생, 영남대 법학부

   
▲지방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무능한가? (사진/이광수)

한강 이남에선 가장 우수한 대학

지금 여기, 서울에서 약 300여km 떨어진 경북 경산의 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로 정평 있는 OO대학교는…” 통화연결음이다. 교내기관에 전화를 걸때마다 이 말을 듣게 되는데 참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강 이남의 지역명문대학. 우리 사회의 대학에 대한 지도를 적확히 드러내는 이 말. 지방대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많은 지방대학이 각자 한강 이남에선 가장 우수하다고 말한다. 그나마 비좁은 대한민국을 토막 내는 것도 모자라 지역 내에서도 또 분할하여 새로운 빌보드를 만든다. 무엇이 한강을 기준으로 대학을 갈라놓았을까?

굳이 지방대학의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방대학은 지역민들의 자존심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지역의 명문대학은 졸업과 동시에 그 지역에선 최고라는 자부심과 함께 특유의 인맥중시 경향으로 인해 우선 채용되는 특혜를 누려왔다. 마치 신토불이처럼. 그러나 현재는 알다시피 지역기업의 일자리조차 서울, 수도권 출신대학 졸업자들이 모두 채우고 있다. 일자리처럼 심지어 올해 개원한 법학전문대학원도 그러하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동시에 지방대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인식은 더욱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따져보자. 서울권 대학과 지방대학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지방대학생 수준이 낮다고...

우선 흔히 거론되는 학생의 질적 수준 문제 즉, 서울권 대학생들에 비해 지방대학생들의 지식수준, 학업능력 등이 낮다는 것이다. 물론 지방대학이 서울권대학보다 입시성적이 낮은 것은 확연하다. 몇몇 특수대학이나 특수학과는 예외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 외에도 지방에 있다는 것 자체로 소외되는 것은 수없이 많다. 각종 문화적 행사, 사회적 관심, 언론의 관심에선 항상 뒷전이다. 교통이 불편한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라도 지방대가 언론의 관심이 되는 것은 높은 등록금이나 특종감의 사고가 터졌을 경우에나 관심을 받는다.

또한 서울권 학생들에 비해 지방대학생들은 자기표현에서 서툴고, 부족하다는 인식이다. 대체로 다양한 문화와 소비를 접하며 경험을 쌓아온 서울권 학생들은 옷 입는 것부터 세련되고 또 말과 자기표현에 있어 충실하다. 반면 지방대학생들은 침체된 지역의 분위기에 처음 주눅이 들고, 소위 열등감을 갖기 때문에 자기표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사람들은 또 백화점식 학과 제도를 탓하기도 한다. 대학 중에서도 종합대학이 많으며 학과 또한 천편일률이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고들 말한다. 서울권 대학은 가만히 있어도 학생들이 몰려 정원이 채워지는 편이지만, 지방대학은 직접 뛰어도 매년 정원을 채우기가 힘들다. 강의실 풍경은 어떤가. 교수들은 학생 목소리 한번 듣기가 힘들다. 그나마 출석이라도 부르는 날이면 모르지만, 요즘엔 카드로 전자출결을 하는 시스템이라 학생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유령처럼 출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교수들은 질문과 발표를 평가점수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다 허사다. 강의보다는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는 일이 우선인 학생들은 토익과 자격증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런 탓에 비자발적인 토론과 질문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만 반복될 뿐이고, 수업의 열기는 점점 식어만 간다.

욕망의 소도시를 둘러싼 ‘파수꾼들’

지방대를 지방에서 가두고 있는 제1의 파수꾼은 학생들의 열등감과 지방대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다. 이 둘은 교묘한 관계를 끊임없이 이어가며 학생들을 곤혹에 빠트린다. 학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괜스레 소속대학을 말하기가 꺼려지고, 자신감이 줄어든다. 이것이 비단 개인만의 차이일까. 가끔 일간지를 보면 세계대학 순위에서 서울대가 몇 등이니 하는 기사가 대문짝만한 제목을 달고 1면에 게재될 때가 있다. 또 매스컴뿐만 아니라 온갖 광고(병원, 학원 등)에선 “서울대 출신 전문의, 연·고대 출신 선생님 영입”과 같이 광고명보다 대학명이 더 크게 표시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인터넷에선 끊임없이 학벌의 재생산과 분배가 이뤄지며 소위 ‘지잡대’(지방 잡 대학의 줄임말)라는 표현을 써가며 지방대학을 깔아뭉개기에 정신이 없다. 어떤 경우에는 학교를 가는 길에서도 그러한 일이 생긴다. 편입학원 광고지다. 그 학원에 등록만 하면 자신의 학벌을 마치 세탁이라도 할 수 있으며, 소외당한 정신을 말끔히 치료라도 해줄 수 있단 듯이 편입학원 광고지는 떠든다. 마치 지방대생을 위한 전문병원인양.

다음으로는 가볍고 뻔해빠진 사회적 풍토를 들 수 있다. 학생들이 즐겨보는 대학전문 잡지에선 스쿠터가 어쩌고, 올 여름패션은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한참 나오고 난 뒤에야 잠깐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고충, 인턴을 하며 겪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 뒤엔 또 어느 집 커피가 맛있니 하는 얘기가 이어진다. 대기업들과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도 마찬가지이다. 모그룹의 대학생 전문 게시판에서는 각 지역 학생들이 자신의 대학 주변 또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지만, 가십이나 허황된 말들로 포장한 포부들이 대부분이다. 그 기업의 사이트에서 자신을 더 돋보이기 위해 아첨을 하고, 그곳에서 활동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스펙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 기업에 꼭 취직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안주하는 지방대생이란 소리는 술안주나 하라지”

그렇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단 지방대생들의 취업률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학생들의 자신감 향상이 곧 모든 일의 시작이므로 학교는 이를 향상시키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우선 대학홍보팀을 앞세워 학교와 관련된 대외적 행사홍보나 각종 수상자와 장학혜택을 끊임없이 홍보하며 학교의 이미지를 쌓으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한 지방대학캠퍼스의 등록금이 전국 최고로 나타났다면 그 순위 분석은 잘못 계산됐기 때문에 전국에서 제일 비싼 것은 아니라는 식이다. 그럼에도 등록금이 천만 원이 넘는 것은 변함없으며 비교대상이 된 대학이 지방에 있건 서울에 있건 간에, 학생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변함없기 때문에 실상은 순위매기기가 숫자놀음에 불과함에도 학생들은 혼동하게 된다. 이외에도 “국회의원 몇 명 배출, 특정지역에선 OO대학 나와야 출세”등의 기사로 학생들을 환상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그 외에도 하는 일은 많다. 학생취업률 제고를 위해 ‘취업 스터디룸’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항상 스터디룸 근처에선 우렁찬 인사소리와 자기소개가 복도를 울린다. 그러나 취업스터디룸이 늘어나고 새로운 건물이 일 년이 멀다하고 솟아나도, 강의실에선 항상 자리가 모자라고, 열람실 역시 마찬가지로 자리를 맡기 위해 아침마다 뛰어와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지방대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물을 것도 없이 취업에 목매고 있다. 토익, 자격증, 인턴 등을 통해 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을 하는 학생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있으며, 학점을 일부러 포기해 졸업을 미루기도 한다. 이는 비단 지방대학생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지만, 학생들은 지방대학이라는 단점을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공모전,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방학 때면 어학연수 등으로 숨 돌릴 시간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을 하는 사람은 낙오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방대학생 대부분은 서류심사에서부터 떨어지는 현실이다. 학벌사회에서 지방대학의 꼬리표를 달고는 서류에서 통과하기조차 쉽질 않다. 혹은 편입철을 기다리며 이를 준비하는 메뚜기족도 간혹 있다. “토익 책이 너덜해지고 입사지원서에 잉크가 마를 날이 없어도 바뀌지 않는 것은 지방대 학벌이라는 꼬리표더라”고 술자리에서 한탄하던 선배의 말을 떠올리면 편입역시 전혀 특이한 모습이 아니다. 아예 수능을 다시 치는 경우도 있다. “제대한 후 재수를 해서 ‘욕망의 대도시’로 갔다는 과 선배. 이제 욕망의 ‘소’도시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다. 이 도시에선 한 사람이 줄어들고 또 늘어나는 끊임없는 가감만이 계속된다”는 생각이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결국 모두가 지키지 않는 지방대학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지방대학을 살릴 방법은 없나?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주요문제는 지방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과 그에 따른 역량강화이다. 수능세대, 그 중에서도 입시성적이 낮아서 지방대학에 입학했다는 인식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대학 내내 공부도 안하고 또 못한다는 것은 아니올시다. 서울이건 지방이건 간에 지금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모르는 한국의 대학생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지방대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낳고 확산되고 있다.

인식을 개선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는 우선 정부의 지방대학에 대한 지원에 있어 특단이 필요한 것이다. 지역대학과 지역을 위한 정책의 증대와 지원이 필요하다. 즉, 지역대학의 특색을 살린 학문에 대한 지원강화와, 대학생들의 교육활동, 봉사활동 등을 통한 지역민과의 교류증대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정책적인 방법이다.

또한 지역대학들은 대학 간 연계를 통해 지역별로 특색 있는 학문의 심화와 지역대학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예를 들어 광주와 같은 민주화 도시에서는 그와 관련된 지역학문, 경북과 같은 경우에는 독도영유권 문제와 관련된 학문의 강화 등. 이미 기성의 방법 외에도 그러한 스토리를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지역민과 연계할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 등을 구성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특히 지방대학생들에게 단순히 취업에만 목맬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지역대학생들 간의 교류를 통한 지역공동체에 대한 의식함양이나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정책적으로 증가시킬 방편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학생들은 강의실에서도 꿈틀거려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교수들의 강의평가에 있어 더욱 충실해야 하며 이것이 강의실에 반영되지 않을 경우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또한 대학 외의 일에도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앞의 보잘 것 없는 생각들보다 대안이나 정책 등은 대학관련 전문가들이 더욱 잘 짜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지역대학만의 '특색'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대학생들이 정말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하루빨리 찾고, 지역과 더불어 상생할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지역학문과 함께 도끼자루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홍상현(대학생, 영남대 법학부)


2009. 6. 25. 18:45

대학정상화투본 국회앞농성 655일 소식지


2009. 6. 22. 15:33

대학 시설 현주소를 말한다/김지혜/지금여기

대학 시설 현주소를 말하다
[오늘, 대학을 말한다-3]
2009년 06월 21일 (일) 11:28:08 김지혜 대학생, 대전지역

   
▲ 1000만원 등록금 시대에 걸맞는 대학 시설인가?(사진/이광수)

현재 이 시대는 그야말로 등록금 전쟁이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가 도래하면서 등록금에 대한 논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그칠 줄도 모르고 등록금은 계속해서 오른다. 이는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학교 측에서는 물가인상의 이유나 학교 시설 확충, 학생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학교에서는 어떤 시설을 확충하려고 그럴까? 그래서 교육의 질이 더욱 높아질까? 나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왜냐하면 현재 등록금 1000만원시대라 해도 그에 상응하는 대학 시설은 매우 미비하기 때문이다.

개인당 학기 마다 300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내고도 그에 맞지 않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대학교의 경우는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써 학습을 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환경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 시설은 학습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지만 현 대학교의 시설은 학생들이 내고 있는 등록금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에 현재 대학교 내에 구비돼 있는 시설(강의실, 식당, 도서관, 각종 편의시설)에 대해서 그 실태와 상황을 다뤄본다.

여유로운 공간이 필요해

대학은 각 학과마다 전용으로 쓰는 강의실이 있다. 그것을 ‘전용 강의실’이라 부른다. 전용강의실은 학과 학생들 위주로 사용되는 곳으로 학과 특성에 맞게 기자재나 시설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전용 강의실로 통해 학생들은 학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됨으로써 공부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전용 강의실의 공간이 여의치 못한 실정이다. 학과 당 전용 강의실이 학과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뿐더러 아예 전용 강의실이 구비되지 않은 학과도 많기 때문이다. 이에 학생들은 학습을 할 수 있는 곳을 직접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이 밖에 일반 대학교 내에 있는 강의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책상, 의자부터 칠판이나 기타 수업에 쓰이는 시설물들은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강의실 마다 학생 수에 맞는 책걸상이 없어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도 책걸상이 모자라 옆 강의실에서 직접 가져오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강의실 내부 관리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아 어수선한 곳에서 강의를 하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론 위주로 전공하고 공부하는 학과라면 다행이겠지만 실용적인 학문이나 실험, 연구하는 학과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특히 공대의 경우는 컴퓨터나 여러 실습 기구들이 매우 모자라는 상황이다. 주로 수업을 컴퓨터로 진행되는 학과는 컴퓨터의 수가 여유롭지 못하거나 사양이 좋지 못해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대학교 내에서 교육이 실현되는 공간이 열악한 상황이라 그 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역시 완전한 학습을 할 수 없다.

다양한 식당, 하지만 위생은 책임지지 못해

우리 대학만 하더라도 대학 내에 있는 식당만 5곳이 있다. 토스트나 김밥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중국요리 등, 학생식당을 이용함으로써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학생식당을 제외하고는 대학 내의 식당에 대한 체계적인 위생관리는 이뤄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학생식당의 경우는 정기적으로 위생점검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이외에 음식점의 경우 특별한 위생 점검이 이뤄지고 있지 않고 있다. 때문에 식당 위생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고, 적절한 대안책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에 식당 측에 대한 체계적인 위생 점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다양한 이용이 엿보이는 도서관

도서관은 학생들이 책을 빌리고 시험기간에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학생들의 이용이 매우 높다. 또한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해당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어 도서관 이용이 활발하다. 도서의 관리도 대체적으로 잘 이뤄지며 최근에는 도서대여 뿐만 아니라 DVD 관람, 인터넷 카페 등 다양한 시설 구비로 학생들의 다양한 이용이 이뤄지고 있다.

공간 부족으로 부족한 휴식공간

우리 학교의 경우 휴식공간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현재 학교 내에 있는 휴식공간으로는 여학생 휴게실로 침대와 잡지 등이 마련돼 있어 여학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의 활용은 계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학생 휴게실을 관리하는 학생들도 개방된 시간 내내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히 문단속을 하거나 특별히 휴게실 관리를 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사용하는 일부 학생들이 기물을 파손해도 마땅한 대안책을 내놓지 못한다. 휴게실 내부가 금연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담배를 피는 학생이나 휴게실 안에서 친구들과 지나치게 떠드는 학생들에 대한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학생 휴게실이라는 공간 활용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밖에 휴식공간은 학교 내의 공간 부족으로 더 이상 만들어지는 게 사실상 어렵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공강시간이 남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마땅한 휴식공간이 없어 학교 밖에 있는 PC방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학교 측은 공간 부족으로 휴식공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는 공간 부족으로 인해 학과마다 제공되는 과방의 수가 적다.

과방은 학과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용강의실이 학과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과방은 학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학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과방이 있는 학과의 수는 드물어 과방이 따로 없는 학과들은 전용강의실을 과방으로 겸해서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공간부족으로 인해 학생들의 휴식공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공간시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다.

소수지만 해당 시설이 있어야

학교마다 소수지만 장애학생이 다닌다. 이에 대학시설 가운데 장애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한 시설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장애 화장실, 장애 보도블록이 전부이다. 실질적으로 장애를 가진 학생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파른 언덕에 수많은 계단,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은 일반 학생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다. 몸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그나마 있는 화장실의 경우도 공간만 넓고 보통 화장실과 다를 것이 없다. 일반 학생과 비교해 학교를 다니는 장애학생의 수는 매우 적지만 소수의 학생도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애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등록금에 맞는 시설마련 필요하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넘는 등록금 인상, 근거 제시도 없이 학생 수와 정부의 예산지원이 감소했느니 좋은 시설과 뛰어난 교수진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두루뭉술한 이유만으로는 앞에서 다룬 학교 시설의 부족한 현실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과연 등록금 1,000만원에 상응하는 수준 높은 교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검토해볼 일이다.

-김지혜(대학생, 대전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