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127건
- 2009.07.21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 2009.07.20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 2009.07.14 대졸자의 직장생활/박성찰
- 2009.07.14 대학생과 군대/김성환
- 2009.07.05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 2009.07.03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조한일 1
- 2009.06.29 대학생과 대학생협의 역할/경희대 김한울
- 2009.06.28 욕망의 소도시, 지방대학을 지방에서 석방하라/홍상현
- 2009.06.25 대학정상화투본 국회앞농성 655일 소식지
- 2009.06.22 대학 시설 현주소를 말한다/김지혜/지금여기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 |||
[오늘, 대학을 말한다-10] | |||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 촉구 국회앞 텐트농성 684일째!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대학생의 공간-비정규직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84225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 이 땅의 대학원생은 참 학문의 열정을 포기해야 살 수 있는가?(사진/이광수)
입시로또의 꿈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모든 학부모들이 입시경쟁에서 내 아들 딸만은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를 가진다. 나아가 입시경쟁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의 미래를 보장해주리라는 꿈을 가진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서너 살 때부터 꼬박 15년을 어른도 견디기 힘든 입시경쟁 속으로 기꺼이 밀어 넣고 있다. 이 경쟁은 승리한 1%에게 평생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입시로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산업을 지배하는 사교육 카르텔이 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 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오늘도 교육로또를 꿈꾸는 절대다수의 ‘대리만족형’ 서민들이 허리를 휘어가며 아이들을 숨막히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로또 추첨의 결과는 언제나 ‘기득권 세습형’의 승리, 극소수를 위한 절대다수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극소수와 절대다수의 사이에 ‘역경극복형’이 있지만, 언론의 과대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자살형’과 마찬가지로 꼴찌당첨자일 뿐이다. 어려운 관문을 뚫은 사람들이 교수임용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오늘날 한국대학의 현실이다. 그런데 진실과 합리를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이 이 현실에 침묵한다. 왜 그런가? 바로 여기에 어린 쥐의 행렬, 교육로또의 먹이사슬의 비밀이 숨어있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고리는 바로 ‘비정규교수’에 대한 합법적 제도적 차별이다. 비정규 교수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글 류승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수료)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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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 ||||||
[오늘, 대학을 말한다-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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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안검사를 만난 적이 있다. 지난 해 촛불이 한창 타올랐던 6월 10일 부산 서면 로타리를 점거를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검사실에 들어가 꾸벅 인사를 했지만, 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명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서 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했지만 범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이태백이 풍류를 즐길 없는 .. 삶이 보장돼야 학문의 자유도.. 유럽에서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충분한 휴식과 사유의 시간 이후에 창의적 노동이 가능하며, 생존의 위협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OECD 국가 가운데 세계 1위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21C형 산업사회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현재 OECD 평균인 20%에 훨씬 못 미치는 5% 정도의 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망의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가질 수 있다. 최근 이것의 유력한 정책적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2010년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현재 소액의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좌․우를 막론하고 정책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라는 각국의 기본소득 관련 단체들의 연대체도 존재한다. 글 박정훈(대학생사람연대 대표, 부산대학생)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
대졸자의 직장생활/박성찰
대졸자의 직장생활 | ||||||
[오늘, 대학을 말한다-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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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감사합니다. 박성찰 입니다!” 가족처럼 따뜻하지만 이면에는 얼음장같은 냉정함이 있는 곳, 바로 직장. 지금부터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느낀 “직장”이라는 곳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우수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 내가 아닌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는 느낌, 이러한 생각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 생활이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라는 궁금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이러한 매너리즘이 최고점에 달할 무렵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말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힘든 시기는 없었다. 돈을 많이 줘서, 흔히 말하는 짤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본 대학-취업-직장이라는 과정은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기업에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취업만 하면 일단은 백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이유,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일단은 입사를 결정한다. 때문에 입사의 출발은 처음부터 불안감과 함께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청년 실업의 현실이다. 맹목적인 선호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대학,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교육기관으로 취업률 조사를 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까지 취업자로 둔갑하고 때문에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이 취업률1위라는 현수막을 당당하게 내걸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글을 올리는 나 역시도 이러한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해법은 바로 “대학”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박성찰(영남대 졸업생) | ||||||
대학생과 군대/김성환
대학생과 군대 | ||||||
[오늘, 대학을 말한다-7] 지금은 변화를 꾀해야 할 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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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과 군대...나는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지만..."을 말하려면 우선 대학생의 현 상황을 알아야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대학이라면 지식의 상아탑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현재의 대학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정교수에게는 안정적인 고수익의 직장이자, 권력의 장이다. 대학생들에게는 그저 대학이 배워가는 ‘지성인들의 배움의 장’이 아닌 단순히 좋은 직장으로 가기위한 좋은 대학명함 만들기에 급급한 곳이다. 대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지금 대학은 대학생들에게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으로 밖에 자리매김을 못한 것 같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주요과목의 배움터이다. ‘아! 그렇다면 대학은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학생들은 어떠한 것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인가?’ 대학은 단순히 전공 공부만 하는 그런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사회에 나가기 이전에 준사회인이 된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군대 갔다 오더니 철 들었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 그렇다! 대학생과 군대의 공통점이라면 ‘누구나 간다.’라는 인식이 아닐까? 더욱이 젊음을 보내는 곳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가야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대학교에서도 큰 꿈을 펼치는 경우도, 군대에서도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을 겪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뉴스나 신문, 인터넷에서 듣는 그런 일들이다. 실상 주위에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가 많지 않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답을 풀어보자. 행동하지 않는 사회의 중심, 대학생 요즘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촛불집회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을 것이다. 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촛불집회를 국민들끼리 그리고 국민과 국가가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름의 방식대로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사람을 나는 ‘지성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대학생이 되어야한다. 가만히 않아서 사회의 문제점들은 생각하지도 않거나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으로서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학생의 타이틀이 아깝다. 적어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글 김성환(고려대학교 세종배움터 민중민주 정치경제학연구회) |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 ||||||
[오늘, 대학을 말한다-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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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조한일(고려대생) |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조한일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 ||||||
[오늘, 대학을 말한다-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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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조한일(고려대생) |
대학생과 대학생협의 역할/경희대 김한울
대학생활협동조합의 역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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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나간 대학 환경 |
욕망의 소도시, 지방대학을 지방에서 석방하라/홍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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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lub.cyworld.com/52842255113/31188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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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설 현주소를 말한다/김지혜/지금여기
대학 시설 현주소를 말하다 | ||||||
[오늘, 대학을 말한다-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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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시대는 그야말로 등록금 전쟁이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가 도래하면서 등록금에 대한 논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그칠 줄도 모르고 등록금은 계속해서 오른다. 이는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학교 측에서는 물가인상의 이유나 학교 시설 확충, 학생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학교에서는 어떤 시설을 확충하려고 그럴까? 그래서 교육의 질이 더욱 높아질까? 나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왜냐하면 현재 등록금 1000만원시대라 해도 그에 상응하는 대학 시설은 매우 미비하기 때문이다. 개인당 학기 마다 300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내고도 그에 맞지 않는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대학교의 경우는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써 학습을 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환경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 시설은 학습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특히 공대의 경우는 컴퓨터나 여러 실습 기구들이 매우 모자라는 상황이다. 주로 수업을 컴퓨터로 진행되는 학과는 컴퓨터의 수가 여유롭지 못하거나 사양이 좋지 못해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대학만 하더라도 대학 내에 있는 식당만 5곳이 있다. 토스트나 김밥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중국요리 등, 학생식당을 이용함으로써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학생식당을 제외하고는 대학 내의 식당에 대한 체계적인 위생관리는 이뤄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학생식당의 경우는 정기적으로 위생점검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이외에 음식점의 경우 특별한 위생 점검이 이뤄지고 있지 않고 있다. 때문에 식당 위생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고, 적절한 대안책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에 식당 측에 대한 체계적인 위생 점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도서관은 학생들이 책을 빌리고 시험기간에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학생들의 이용이 매우 높다. 또한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해당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어 도서관 이용이 활발하다. 도서의 관리도 대체적으로 잘 이뤄지며 최근에는 도서대여 뿐만 아니라 DVD 관람, 인터넷 카페 등 다양한 시설 구비로 학생들의 다양한 이용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 학교의 경우 휴식공간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현재 학교 내에 있는 휴식공간으로는 여학생 휴게실로 침대와 잡지 등이 마련돼 있어 여학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의 활용은 계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학생 휴게실을 관리하는 학생들도 개방된 시간 내내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단순히 문단속을 하거나 특별히 휴게실 관리를 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사용하는 일부 학생들이 기물을 파손해도 마땅한 대안책을 내놓지 못한다. 휴게실 내부가 금연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담배를 피는 학생이나 휴게실 안에서 친구들과 지나치게 떠드는 학생들에 대한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학생 휴게실이라는 공간 활용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과방은 학과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용강의실이 학과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과방은 학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학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과방이 있는 학과의 수는 드물어 과방이 따로 없는 학과들은 전용강의실을 과방으로 겸해서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공간부족으로 인해 학생들의 휴식공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공간시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고민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다. 학교마다 소수지만 장애학생이 다닌다. 이에 대학시설 가운데 장애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한 시설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장애 화장실, 장애 보도블록이 전부이다. 실질적으로 장애를 가진 학생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파른 언덕에 수많은 계단,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은 일반 학생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다. 몸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그나마 있는 화장실의 경우도 공간만 넓고 보통 화장실과 다를 것이 없다. 일반 학생과 비교해 학교를 다니는 장애학생의 수는 매우 적지만 소수의 학생도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애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넘는 등록금 인상, 근거 제시도 없이 학생 수와 정부의 예산지원이 감소했느니 좋은 시설과 뛰어난 교수진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두루뭉술한 이유만으로는 앞에서 다룬 학교 시설의 부족한 현실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과연 등록금 1,000만원에 상응하는 수준 높은 교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검토해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