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과 군대/김성환
대학생과 군대 | ||||||
[오늘, 대학을 말한다-7] 지금은 변화를 꾀해야 할 시기! | ||||||
| ||||||
"대학생과 군대...나는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지만..."을 말하려면 우선 대학생의 현 상황을 알아야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대학이라면 지식의 상아탑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현재의 대학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정교수에게는 안정적인 고수익의 직장이자, 권력의 장이다. 대학생들에게는 그저 대학이 배워가는 ‘지성인들의 배움의 장’이 아닌 단순히 좋은 직장으로 가기위한 좋은 대학명함 만들기에 급급한 곳이다. 대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지금 대학은 대학생들에게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으로 밖에 자리매김을 못한 것 같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주요과목의 배움터이다. ‘아! 그렇다면 대학은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학생들은 어떠한 것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인가?’ 대학은 단순히 전공 공부만 하는 그런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사회에 나가기 이전에 준사회인이 된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군대 갔다 오더니 철 들었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 그렇다! 대학생과 군대의 공통점이라면 ‘누구나 간다.’라는 인식이 아닐까? 더욱이 젊음을 보내는 곳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가야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대학교에서도 큰 꿈을 펼치는 경우도, 군대에서도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을 겪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뉴스나 신문, 인터넷에서 듣는 그런 일들이다. 실상 주위에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가 많지 않다. 대학생도 풍년, 군인도 풍년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답을 풀어보자. 행동하지 않는 사회의 중심, 대학생 요즘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촛불집회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을 것이다. 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촛불집회를 국민들끼리 그리고 국민과 국가가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름의 방식대로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사람을 나는 ‘지성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대학생이 되어야한다. 가만히 않아서 사회의 문제점들은 생각하지도 않거나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으로서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학생의 타이틀이 아깝다. 적어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글 김성환(고려대학교 세종배움터 민중민주 정치경제학연구회) |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 ||||||
[오늘, 대학을 말한다-6] | ||||||
| ||||||
‘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조한일(고려대생) |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조한일
대학생의 취업,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 ||||||
[오늘, 대학을 말한다-6] | ||||||
| ||||||
‘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조한일(고려대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