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1. 20:34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석박사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오늘, 대학을 말한다-10]






2009년 07월 21일 (화) 09:18:49 류승완 .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 촉구 국회앞 텐트농성 684일째!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

                                                                        http://stip.tistory.com

대학생의 공간-비정규직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842255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이 땅의 대학원생은 참 학문의 열정을 포기해야 살 수 있는가?(사진/이광수)

 










입시로또의 꿈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따님이 이번에 ㅅ대학에 들어갔다면서요.” 몇 년 전에는 이런 인사가 흔했다.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형편이 펴지고, 부모의 체면이 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집안의 형편이 펴진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 이번에 검사가 되셨다면서요.” 이 정도는 되어야 편하게 인사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는 우리의 가족문화에서 혈육에 대한 육친의 기대와 헌신은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애틋하다. 자식 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부모의 심정은 해마다 신문에 실리는 ‘수능시험장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신문에는 해마다 꼭 같은 기사가 실린다. “학교수업 만으로 전국수석” 그 옆에 “역경을 딛고 명문대 합격”이란 기사가 양념으로 붙어 있는 것도 해마다, 신문 마다 같다.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모든 학부모들이 입시경쟁에서 내 아들 딸만은 살아남으리라는 기대를 가진다. 나아가 입시경쟁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의 미래를 보장해주리라는 꿈을 가진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서너 살 때부터 꼬박 15년을 어른도 견디기 힘든 입시경쟁 속으로 기꺼이 밀어 넣고 있다. 이 경쟁은 승리한 1%에게 평생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입시로또이기 때문이다.

로또는 2천원을 걸지만 입시로또는 평생을 건다. 아주 힘들어서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기도하는 어머니’와 ‘학교공부에만 충실한 전국수석’과 ‘역경을 이겨낸 합격생’ 옆에는, ‘대입시험 비관자살’의 悲報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다. 아마도 지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공부를 못해서’ 죽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입시로또의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지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죽어야 하는 괴로움마저도 이겨내는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이 꿈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과 계층재생산의 꿈이다. 없는 자는 자식을 가르쳐서 없는 한(恨)을 풀려고, 가진 자는 기득권을 물려주려고 ‘간판’과 ‘자격증’이라는 꿈의 대열에 개미처럼 줄서는 것이다. 도대체 이 꿈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근대화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근대적 교육제도이다. 그리고 근대적 교육제도란 다름 아닌 1백년 전 일제(日帝)가 우리에게 강제한 식민지 통치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본질은 ‘절대다수의 희생과 소수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물론 특권을 누리는 소수는 조선을 통치하는 일본인들과 그에 협력한 한줌 친일반역자들이었고, 희생당하는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이제 해방과 분단이 60년을 지났건만 이 꿈은 ‘사교육’ 이라는 현실과 절묘하게 얽혀있다. 서로 안 맞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맞아서 갈등이다. 꿈은 한풀이와 기득권대물림의 절묘한 조화이다. 현실은 식민지 교육제도와 상업주의의 절묘한 조화이다.

‘2007년 현재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국내총생산(GDP)의 6.4%, 55조원 규모로 농어업보다 2.2배가 크고, 부동산·건설업 등과 맞먹는다. 전체 건설업 종사자가 180만명인데, 사교육종사자 160만 명이다. 국민전체 지출의 11%로 가계비에 가장 큰 부담인데 불황에도 유일하게 높아진다. 소비지출의 9.4%로 추정되는 교육비는 OECD 국가들 중 수위를 다투고 있다. 이에 비해 정부지출은 43.4%에 불과하고 공교육비 정부분담률은 59.7%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이다. 결국 공적인 교육산업을 사적 영리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교육산업의 신자유주의화이다(김일영, 2009, <한국교육산업의 현주소>, 새사연).’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어린쥐’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팔 걷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입시로또가 조선의 농민에게 대과 급제처럼, 일제하의 농민에게 대학교처럼, 누군가는 해당되지만 절대다수 ‘돈 없는’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입시로또의 꿈은 ‘식민주의 공교육’과 ‘상업주의 사교육’이라는 현실과 칡덩쿨처럼 얽혀서 아이들을 기약 없는 ‘입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 치달음의 끝은 어디인가?

입시로또라는 경쟁은 누구에게도 성공을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최대다수의 불행과 극소수의 행복’ 만은 확실히 보장한다. 그런데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근대의 기본공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가치는 우리 생각을 규정하는 절대선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교육제도와 현대적 교육시스템이 이 기본가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 논리상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도 그대로 모순으로 나타난다. ‘기도하는 어머니’, ‘과외안하는 전국수석’, ‘역경을 이긴 학생’이 한결같이 달려간 ‘어린쥐’ 교육의 끝, 한국의 대학에는 또 다른 어린 쥐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다.

전문대 위에 4년제, 지방사립대 위에 지방국립대, 지방대 위에 수도권대, 수도권대는 명문대와 비명문대, 명문대는 비인기학과와 인기학과, 인기학과는 국내학위와 외국학위, 외국학위는 또 출신대학별로 줄을 서야 한다. 이 뿐이 아니다. 본격적인 줄서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학 사회는 돈을 내는 집단인 학생과 돈을 버는 집단인 재단과 교수로 나누어져 있다. 학생은 학부생, 석사과정, 박사과정, 박사 후 과정으로 구별된다. 교수는 조교, 직원, 시간강사, 겸임교수, 대우교수, 연구교수/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나누어진다. 다시 (정)교수는 학과장, 학장, 보직교수, 부총장, 총장으로 나뉘고, 그 뒤에는 사학재단과 교육관료로 연결된 먹이사슬이 있다.

그리고 교육산업을 지배하는 사교육 카르텔이 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 이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는 오늘도 교육로또를 꿈꾸는 절대다수의 ‘대리만족형’ 서민들이 허리를 휘어가며 아이들을 숨막히는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로또 추첨의 결과는 언제나 ‘기득권 세습형’의 승리, 극소수를 위한 절대다수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 극소수와 절대다수의 사이에 ‘역경극복형’이 있지만, 언론의 과대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자살형’과 마찬가지로 꼴찌당첨자일 뿐이다.

대학원생의 꿈

그러면 도대체 입시경쟁의 종착점이라는「지금」,「여기」의 대학의 실상은 어떤가? 이러한 현실에서 대학원생은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이런 질문은 막대한 등록금을 바쳐가면서 내 자녀와 제자의 인생을 믿고 맡기는 ‘대학’에 대해서 학부모나 선생님들도 같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대학의 본령은 학문연구를 통한 교육과 지식의 생산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원생들은 대학의 중추, 나아가 사회의 미래라 할 만하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쳐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확률은 그야말로 로또당첨에 버금가는 확률일 것이다. 10만 명을 훨씬 넘는 한국의 비정규교수(시간강사)와 대학원생들이 이 어려운 관문을 거치는 이유는 대부분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진실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은 ‘어린쥐’ 교육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어려운 관문을 뚫은 사람들이 교수임용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오늘날 한국대학의 현실이다. 그런데 진실과 합리를 추구하는 대학원생들이 이 현실에 침묵한다. 왜 그런가? 바로 여기에 어린 쥐의 행렬, 교육로또의 먹이사슬의 비밀이 숨어있다.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고리는 바로 ‘비정규교수’에 대한 합법적 제도적 차별이다. 비정규 교수는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비정규교수와 정규교수(전임강사 이상)는 임금(동일노동에 10배 이상 격차), 고용, 신분, 처우, 복지 등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직원은 교원이지만 시간강사는 교원이 아니며 그렇다고 노동법이 보장하는 근로자도 아닌 실종된 존재이다. 그의 인권과 노동권은 사회적 평균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어떤 대학원생도 ‘눈물의 골짜기’를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학문적 진리보다는 눈치보고 줄서는 어린 쥐의 대열에 끼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학위를 받는 과정 자체가 일제 식민지 교육의 봉건적 요소를 철저하게 유지해놓고 있다. 제도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원천적으로 가로막힌다. 합리적인 연구자는 꿈을 거세당하고, 비판적인 연구자는 존재자체를 부정 당한다.

이 모든 문제가 교원관련 법조항에 원래 있던 ‘강사’ 한 단어를 복원하면 해결되는데도 10만 명이 넘는 대학원생들이 침묵하고 있다.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 우리 대학원생은 생활을 위해 꿈을 접고, 살기위해 비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상의 모든 나라 가운데, 대학원생, 연구자가 ‘참다운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에 죽어야 하고, 그것을 포기해야만 살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이러한 현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꿈’은 모든 괴로움을 참게 만든다.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버려야만 살 수 있는 대학원생의 꿈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글 류승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수료)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2009. 7. 20. 21:02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법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에 가지 않을 자유
[오늘, 대학을 말한다-9]
2009년 07월 16일 (목) 18:52:53 박정훈 대학생사람연대 대표, 부산대학생

   
▲지금 대학생의 공부는 높은 몸값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사진/이광수)

2008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안검사를 만난 적이 있다. 지난 해 촛불이 한창 타올랐던 6월 10일 부산 서면 로타리를 점거를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검사실에 들어가 꾸벅 인사를 했지만, 검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분명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서 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했지만 범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검찰은 이 모든 것이 철거민 탓이라고 이야기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구속했다. 경찰은 무혐의였으며, 조직폭력배 4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계속해서 ‘법치’를 강조하고 있는 요즘, 사법부에 속한 사람들은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들을 해본 적이 있을까? 한쪽에서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이 위헌이라고 생각한 판사가 위헌제청을 하고 판사직을 그만두기도 했다. 그런데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관이라는 사람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판결을 내라고 이야기한다. 법에 대해 철학이 없는 사람이, 사법부의 최고수장이 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과대학을 로스쿨로 전환해서, 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 다양한 과에서 학부공부를 마친 대학생들이 로스쿨에 진학하여 토론이 이루어지고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학부는 로스쿨을 가기위한 통로로 변질됐다.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한 이후, 생명공학부 등에 대거 몰려 커트라인이 올라간 사례도 있었다. 한편, 로스쿨 합격생의 3분의 2가 서울 수도권 대학 출신이었다. SKY대학이 각각 288명, 161명, 140명의 합격자를 냈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와 몸값을 올리기 위한 과정인 구조 속에서 로스쿨만 덜컥 도입한다고 해 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로스쿨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범대에 가보면, 진정으로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진학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전문대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사법부와, 인간을 가르치는 교육,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안정적인 일자리로 바뀌어 있었다. 흔히들, 이러한 문제를 요즘 20대들의 도덕적 결함, 이타심의 부족 등으로 꼽는 데, 이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이태백이 풍류를 즐길 없는 ..

이것의 진정한 원인은 20대들의 불안한 미래, 즉 불안정한 노동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20대들이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이 백수)의 이름을 가지고도 제대로 풍유조차 즐길 수 없다. 값싸고 언제든지 자를 수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를 착취하여 성장해온 한국사회가 20대들과 대학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예술가를 꿈꾸는 10대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그림을 엄청난 사교육을 들여 배우고 그린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잘 팔리는 그림, 상품가치가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이에 따라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높은 몸값을 받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대학은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1년에 1000만원을 받고 대학 졸업장을 판다. 비정규직 교수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모습을 현상적으로 잘 보여준다. 대학운영을 기업으로 생각하고, 교육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철학의 빈곤’과 이것을 옹호하는 사회구조의 ‘빈곤한 철학’이 문제이다. 비정규직교수의 과거와 20대 청년들의 미래라는 시간의 대칭이 대학 교양수업 강의실에서 겹쳐지고 있다.

이 문제는 대학교육과 산업구조, 노동시장에 대한 거대한 변형이 있어야 해결가능하다. 21C의 새로운 가치는 지금까지 가치로 인정받지 못했던, 보육과 육아 장애인 활동보조인 등과 같은 돌봄 노동과 사회적 노동에서 나올 수 있다. 이미 한계에 부딪힌 자연에 대한 수탈에서 벗어난 생태적 발전 역시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이다. 그리고 지식, 문화, IT사업에 기반을 둔 고부가가치 사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고숙련노동과 이것을 위한 평생교육시스템, 그리고 창의적 노동을 위한 생활의 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제로 고졸에 독일어밖에 할 줄 모르는 스위스의 노동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계를 만드는 고숙련 시계공이 되어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수 천 만원을 들여 대학을 나온 한국의 대학생들은 청년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삶이 보장돼야 학문의 자유도..

유럽에서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충분한 휴식과 사유의 시간 이후에 창의적 노동이 가능하며, 생존의 위협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OECD 국가 가운데 세계 1위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21C형 산업사회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현재 OECD 평균인 20%에 훨씬 못 미치는 5% 정도의 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망의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가질 수 있다.

최근 이것의 유력한 정책적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2010년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현재 소액의 기본소득을 제공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좌․우를 막론하고 정책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라는 각국의 기본소득 관련 단체들의 연대체도 존재한다.

이렇게 인간의 삶이 보장되어야 만이 대학에서의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으며, 대학생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자신의 철학과 무관한 법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몰리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 어릴 때부터 단편영화들을 촬영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이 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학문을 하고 싶은 이들은 인문학과 기초과학과 같이 소위 ‘배고픈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공부 할 수 있다. 20대의 청년들이 대학을 가는 이유가 생존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마음껏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는 20대의 미래이길 기대해본다.

글 박정훈(대학생사람연대 대표, 부산대학생)
사진 이광수(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nahnews.net/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http://stip.or.kr/와 함께 진행합니다.>


2009. 7. 14. 17:22

대졸자의 직장생활/박성찰

대졸자의 직장생활
[오늘, 대학을 말한다-8]
2009년 07월 12일 (일) 12:53:10 박성찰 영남대 졸업생

   
▲ 지금 대학생은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가? (사진/이광수)

따르릉∼ “감사합니다. 박성찰 입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가장 듣기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함이 공존하는 말이다. 입사 1년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때로는 실수를 연발해 상사들을 당혹케 했고 때로는 좋은 성과를 내어 ‘박성찰’ 이라는 이름 석자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가족처럼 따뜻하지만 이면에는 얼음장같은 냉정함이 있는 곳, 바로 직장. 지금부터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느낀 “직장”이라는 곳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우수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졸업을 앞두고 있다면 누구나 느낄 법한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내가 다니고 있던 영남대 강의실과 도서관,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 담배를 태우던 휴게실에서도 단연 가십거리 중 으뜸이었다. 누구는 어디에 취업을 했고, 누구는 어디에 지원을 했다가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신선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만큼, 취업에 대한 불안함은 졸업예정자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였다.

마지막 학기였던 2008년 상반기에 나 역시 많은 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귀하는 우수한 인재지만 우리 회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었고, 마지막 이라는 생각으로 원서를 낸 L그룹의 한 계열사에 다행스럽게 입사를 할 수 있었다.

그룹연수를 마치고 계열사 연수를 거쳐 지금 내가 속한 부서에 발령을 받기까지는 힘든 취업문을 통과한 나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대기업에서 근무한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교제를 해오던 여자 친구와 입사 후 결혼도 약속했고, 휴일에 학교에 가면 후배들이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소위 남들이 말하는 엄/친/아(엄마친구아들)였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스트레스, 상사에 대한 불만 등 나열하기 힘든 무수히 많은 것들이 암초처럼 숨어 있었다. 입사1년의 범위 내에서 퇴사율과 이직률이 높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던 시기였다.

내가 아닌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는 느낌, 이러한 생각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 생활이 과연 내가 희망하던 직장생활이었는가?”라는 궁금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이러한 매너리즘이 최고점에 달할 무렵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말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힘든 시기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과정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그러한 경험일 수도 있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부분은 적어도 “내가 충분히 가고 싶었던, 그리고 희망했던 회사”라는 전제조건이 선행할 때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돈을 많이 줘서, 흔히 말하는 짤리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본 대학-취업-직장이라는 과정은 솔직히 그렇지 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기업에 입사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취업만 하면 일단은 백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이유,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일단은 입사를 결정한다. 때문에 입사의 출발은 처음부터 불안감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전공을 살려서 취업한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예전에는 아니었는가? 라는 반문도 생겨날 수 있지만 예전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학교 후배들에게 넌 어디에 취업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금융권이요” “대기업이요” “공기업이요” 라는 말 뿐이다. 이유는 돈을 많이 줘서, 흔히 말하는 짤리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

이것이 바로 현재 청년 실업의 현실이다. 맹목적인 선호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었고 지금 현재에도 자신이 정말 가고 싶은 기업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 의견이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입사 1년차의 눈으로 그동안의 직장생활을 돌이켜 볼 때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의 구직활동은 자신에게 있어 자칫 평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교육기관으로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자아를 개발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교육기관으로 대학이 사람들에게 각인된다면 결국 그 피해는 그곳을 거쳐 가는 학생들이 입게 될 것이다.

취업률 조사를 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까지 취업자로 둔갑하고 때문에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이 취업률1위라는 현수막을 당당하게 내걸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글을 올리는 나 역시도 이러한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해법은 바로 “대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창문 밖을 보니 맞은 편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를 태우고 끄다만 불씨 때문에 타는 냄새가 나 누가 신고를 했는가보다. 그 층에 입주한 사람들은 다들 나와서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하는 듯한데, 그 위쪽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방차가 온 줄도 모르는지 저마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TV시청을 하고, 빨래를 걷고 있다. 밑에서는 난리가 났는데도 말이다. 불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아니면 무관심 한 것일까?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지금의 대학문제가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나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고 내 자식들이 안고가야 할 문제일 수도 있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대학이라는 공간이 변화되고, 그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취업보다는 다른 부분 때문에 고민도 해보고 그 고민 속에서 자신이 발전되는 그러한 날이 오길 대졸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박성찰(영남대 졸업생)